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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다 놀러 나간 빈 집에서 수박 한 덩이와 더불어
여름의 휴일을 보내는 적막을 초로의 궁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온 천지가 화덕 속이 되어버린 여름날, 한 덩이 수
박이 주는 경이와 기쁨에 비할진대 저 악머구리 같은 피서지
의 힙합과 하드록은 실로 가여운 바 있다.
수박을 먹는 기쁨은 우선 식칼을 들고 이 검푸른 구형의
과일을 두 쪽으로 가르는 데 있다. 잘 익은 수박은 터질듯이
팽팽해서, 식칼을 반쯤만 밀어넣어도 나머지는 저절로 열린
다.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
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
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새카만 씨앗들이 별처럼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지금
까지 존재하지 않던, 한바탕의 완연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칼
지나간 자리에서 홀연 나타나고, 나타나서 먹히기를 기다리고
있다. 돈과 밥이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필시 흥부의
박이다.
(.........)
***
며칠 전, 아들이 수박 한 덩이를 가져와 식칼로 자르고 저며,
반 쪽을 보관용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며,
"엄마, 시원하게 드셔~ 혼자 있다고, 무거워서 사오기 싫다고
수박 먹지 않으면 여름이 안 지나가."
엄마는 또 감동.ㅎ
나머지 반 쪽을 방금 첫가동시킨 에어컨의 냉기 아래서 모자는
시뻘건 여름 속살을 우적우적, 위 속까지 차거워지도록
시원하게 먹었다.
오늘, 밖은 덥고... 해서 읽던 김훈의 산문집을 라디오 클래식 FM에
섞어 읽노라니, '수박'에 대한 글이 있구나.
그날 아들이 가져온 수박 맛을 떠올리며
이 글을 옮겨 본다. 時宜適切 하기도 하려니와.ㅎ
수박이란 과실을 저토록 명쾌하게 그려내다니...
김훈의 산문은 읽을 때마다, 그 미문에 가슴이 저리기도, 까닭없이
서러워지기도 한다. 흐릿한 그림자로 가라앉은 슬픔의 서정이 그의
글엔 늘 너울거린다. 난 그의 미문이 참 좋다.
그러나 아들이
무더운 날 가져 와 쪼갠 수박 맛 같으랴,
아들의 그 애틋한 마음 같으랴.
사진;
Sceaux 에서 지난 유월 어느날
체리를 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