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수박> -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서

eunbee~ 2019. 7. 29. 14:11

 

(.......)

 

   아이들이 다 놀러 나간 빈 집에서 수박 한 덩이와 더불어

여름의 휴일을 보내는 적막을 초로의 궁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온 천지가 화덕 속이 되어버린 여름날, 한 덩이 수

박이 주는 경이와 기쁨에 비할진대 저 악머구리 같은 피서지

의 힙합과 하드록은 실로 가여운 바 있다.

  수박을 먹는 기쁨은 우선 식칼을 들고 이 검푸른 구형의

과일을 두 쪽으로 가르는 데 있다. 잘 익은 수박은 터질듯이

팽팽해서, 식칼을 반쯤만 밀어넣어도 나머지는 저절로 열린

다.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

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

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새카만 씨앗들이 별처럼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지금

까지 존재하지 않던, 한바탕의 완연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칼

지나간 자리에서 홀연 나타나고, 나타나서 먹히기를 기다리고

있다. 돈과 밥이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필시 흥부의

박이다.

 

(.........)

 

 

***

 

 

 

며칠 전, 아들이 수박 한 덩이를 가져와 식칼로 자르고 저며, 

반 쪽을 보관용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며,

"엄마, 시원하게 드셔~ 혼자 있다고, 무거워서 사오기 싫다고

수박 먹지 않으면 여름이 안 지나가."

엄마는 또 감동.ㅎ

나머지 반 쪽을 방금 첫가동시킨 에어컨의 냉기 아래서 모자는

시뻘건 여름 속살을 우적우적, 위 속까지 차거워지도록

시원하게 먹었다.

 

오늘, 밖은 덥고... 해서 읽던 김훈의 산문집을 라디오 클래식 FM에

섞어 읽노라니, '수박'에 대한 글이 있구나.

그날 아들이 가져온 수박 맛을 떠올리며

이 글을 옮겨 본다. 時宜適切 하기도 하려니와.ㅎ

 

 

수박이란 과실을 저토록 명쾌하게 그려내다니...

김훈의 산문은 읽을 때마다, 그 미문에 가슴이 저리기도, 까닭없이

서러워지기도 한다. 흐릿한 그림자로 가라앉은 슬픔의 서정이 그의

글엔 늘 너울거린다. 난 그의 미문이 참 좋다.

 

그러나 아들이

무더운 날 가져 와 쪼갠 수박 맛 같으랴,

아들의 그 애틋한 마음 같으랴.

 

 

 

사진;

 

Sceaux 에서 지난 유월 어느날

체리를 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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