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지킬 수 없는 약속

eunbee~ 2008. 3. 28. 17:56

아주 오래전,

내가 미에르자를 만난 이듬 해에

그가  나를 위해 정성스레 옮겨 쓴 시 한편을 

내게 건네 주었다.

나는 그 시를 읽고 앨범속에

소중히 끼워 두었다.

 

 

        방문

                             홍 윤 숙

먼 후일......내가

유리병의 물처럼 맑아질 때

눈부신 소복으로

찾아 가리다.

문은

조금만

열어 놓아 주십시오.

 

잘 아는 노래의

첫 구절처럼

가벼운 망설임의

문을 밀면

 

당신은 그때 어디쯤에서

환-희 눈 시린

은백의 머리를

들어 주실까......

 

알듯 모를듯

아슴한 눈길

비가 서리고

 

난로엔

곱게 세월 묻은

주전자 하나

숭숭 물이 끓게 하십시오.

 

손수 차 한잔

따라 주시고

가만한 웃음

흘려 주십시오.

 

창 밖엔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그런 날 오후에

찾아 가리다.

 

********

 

이 시를 간직하며,

우리 서로 세월이 흘러 백발이 되는 날

서로에게 찾아 가서, 이 싯구절을 읊조리며

곱게 세월 묻은 주전자에서 차 한잔을 따르고,

떠나 보낸 세월 얘기하며

남은 세월의 흰 머리카락들을

함께 세며 살자던,

미에르자와 나의 약속.

 

이십 오 륙년이 지난 지금

내 머리엔 어느새 백발이 늘어 가는데

우리의 약속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었다.

미에르자가 먼저 자기의 별로 떠났기 때문에...

 

그는

이 약속만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다.

94년도 여름방학 어느날

우리는 동유럽 여행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여권을 발급 받아야 한다면서, 준비를 하겠노라고 했다.

그 여름이 다 지나도록

아무런 말도 없더니...

이제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우리끼리 여행을 떠났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내따님들과

보쿰에서 우릴 기다리는 노성씨와 함께...

 

영원히 지켜지지 못한 약속은

그렇게 세월속에 묻혀 갔지만

내 맘속엔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고 싶은 간절함이

날마다 애처롭다.

 

 

  미에르자와 함께하지 못한 그 해 여름의 동유럽.... 프라하의 황금소로.

 

 노성씨는 나와 우리 두 따님의 보호자 겸 안내자가 되어

 행복한 유럽 기차여행을 하게 해 주었다.

 그 또한 지난 달, 독일로 다시 떠났다.

 그래서 나는, 또 한사람의 내 보호자를 멀리 두게 되었다. 모두 멀리멀리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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