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생 말로Saint Malo

eunbee~ 2014. 5. 26. 03:06

프랑스



몽생미셸은 Normandy에 속하다가 또는 Bretagne에 속하다가, 밀고 당기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땅이지만, 

몽생미셸에서 서쪽으로 두 시간 남짓 달려오는 생 말로는 분명한 브르타뉴지방에 속하지요.

브르타뉴는 그들의 國歌(내 아버지의 옛땅. 1903년에 채택)를 아직도 기억하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할 정도로 지방색이 강한 곳이랍니다.

노르망디에 비해 경제적으로 쳐진 브르타뉴지방 사람들은 그 자존심 하나만은 옆 동네^^노르망디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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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ton literature

브르타뉴어와 브르타뉴 문학은 고대와 중세 및 근대의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사용된 고대 브르타뉴어는 고유명사들과 문헌의 주석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브르타뉴어로 씌어진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은 아서 왕과 긴클래프라는 이름의 예언자가 나누는 대화를 묘사한 15세기 작품이다. 중세 브르타뉴어로 씌어진 다른 문헌들(1200~1650)은 주로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보아 근대 브르타뉴어는 1659년에 시작되었다고 하나, 문학적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다. 19세기까지도 많은 작품이 중세 브르타뉴어로 씌어졌기 때문이다. 17,18세기에는 종교적 산문과 시도 많이 발표되었는데, 이 시기의 브르타뉴 문학은 대부분 성사극(聖史劇)과 기적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브르타뉴어에 대한 관심은 지방어를 말살하려는 프랑스 정부의 시도에 대한 반발로 19세기초에 되살아났다. 몇몇 산문 작가와 시인 및 극작가는 20세기에도 브르타뉴 문학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생말로에서 가장 유명한 성채 안은 12세기에 축조된 구시가지로 

그 당시의 건축물과 그간의 옛도로가 보존되어있습니다.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호텔과 많은 음식점 그리고 상점들이 즐비해, 옛모습에 어린 옛분위기는 찾기 힘들지요.

나는 혼자 성곽을 돌다가, 성곽 위에서 유명한 크레프집을 찾아들어, 걀레뜨와 시드르를 먹고 마셨어요.

성곽을 돌다 보면 검은 지붕의 크레프리가 있답니다. 맛은 기대하지 말아야 해요.



저 성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구시가지.



구시가지고 뭐고... 분위기 옛스럽지 않지요?

먹고 마시고....



앙드레 말로께서는 생말로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했다지요.

성채에서 나와 시가지로 들어가면 깔끔한 도로, 바닷물이 길 가까이 까지 차오르는 넉넉한 대서양의 풍광,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가지가 마음에 들어요.

이곳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낭만주의 시인 샤토브리앙(1768-1848)의 묘비에는 

'바람소리와 파도소리, 그것말고는 아무소리도 듣지 않으련다'라 쓰여있다네요.


세번째 오는 생 말로. 나도 그랬어요.

일행과 헤어져 성곽을 돌다가 해변 모랫벌로 내려가 바람소리와 파도소리 그리고

평화로이 활공하는 하얀 갈매기들이 가끔 끼룩대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우. 


첫번의 방문 때는 큰딸 부부가 성곽에서 손을 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는 모습을

캠코더에 담아 두었지요.(고향 오두막에서 몽땅 훼손되어버린 ㅠㅠ) 

두번째 방문은 아들 며느리랑 모두모두 함께였어요.

그 때, 행복했던 우리들 파리 가족의 생말로, 

이제는 지나가버린 날들로 멀어져간 세월, 그 추억을 끄집어 내어 바람결에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에혀~








웨일즈에서 브르따뉴로 도망 오신 수도사 말로께서는 생 세르방의 초대주교 자리에 까지 오르고,

프랑스왕의 정식 허가를 얻어 해적질로 부를 축적했다네요. 그는 화강암으로 4km나 되는 성곽을 구축하여

영국의 침입을 예방했더라지요. 그것이 지금의 성채. 노략질의 상대는 영국배.ㅎㅎ 이런이런. 그 이야기는 16세기 적 이야기.ㅎ








성안에 자리한 이상한 과자(불량품 냄새 강한 ㅎㅎ) 파는 가게엔

해적선에서 만나는 많은 인물의 인형들이 무섭게, 혹은 생뚱맞은 모습으로... 해적 마을답게.





부두 주변



시청과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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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dit de Nantes

프랑스 신교도인 위그노에게 광범위한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것으로, 신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파리를 제외한 지역에서 공공예배를 볼 수 있게 했으며, 그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허용했고 신교도와 구교도로 이루어진 특별법원(Chambre de lÉdit)을 만들어 이 칙령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해결하도록 했다. 또 이 칙령으로 신교의 목사는 국가에서 급료를 받게 되었고 일정한 의무가 면제되었으며, 신교도들이 8년 전부터 장악하고 있던 요새들은 계속 그들이 차지했으나 요새의 수비 비용은 왕이 지불하게 되었다(→ 색인 : 종교적 관용).

한편 가톨릭 관행이 중단되어 있는 모든 지역에 가톨릭을 회복시킴으로써 프랑스에서 신교가 확대되는 것을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 칙령은 교황 클레멘스 8세,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 고등법원 등의 커다란 불만을 샀다. 가톨릭 교도들은 칙령을 매우 제한적인 의미로 해석하려 했다. 뒤에 리슐리외 추기경은 낭트 칙령에서 정치에 관련된 조항들을 국가에 위험하다고 여겨 알레 칙령(1629)으로 그 조항들을 무효로 만들었다.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완전히 철폐함으로써 프랑스 신교도의 모든 종교적·시민적 자유를 박탈했다. 몇 년 안에 40만 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영국·프로이센·네덜란드·미국 등지로 빠져나가 프랑스는 가장 근면한 상업 계층을 잃었다.


내가 이번 짧은 여행에서는 무척 게을렀네요. 

사진도 부실, 포스팅도 부실, 그래서 이런 그림 주워다가 미안스러움을 달래보려해요.ㅎ


Francois Alfred Delobbe(1835-1920 프랑스) 가 그린 19세기 적 브르타뉴 여인들


꽃꺾는 소녀


Maternite


고갱의 '브르따뉴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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