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새뮤얼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연극*

eunbee~ 2013. 11. 8. 17:37

11월 3일 일요일,

산울림 소극장엘 갔다.

몇 해 전,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극하기 위해 가본 이후

거의 5~6년 만의 산울림 나들이인 듯하다.

이 날 역시 임영웅 씨 연출의 새뮤얼 베케트(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기 위한 나들이로

오랜만에 아들네랑 함께라서 의미있고 흐믓한 시간이었다.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1952년에 발표되었고,

이듬해 프랑스 파리의 조그만 극장에서 초연을 가졌다고 한다.

 

올해로 44년 동안 임영웅씨가 연출한 [고도를 기다리며],

1969년 창단 공연으로 초연 (한국일보사 내, '산울림' 이라는 극단 이름으로 등록),

1985년 극단 산울림의 개관작으로 공연.

[고도를 기다리며]의 본향인 더블린에서의 연극제 참가를 비롯한 예닐곱 번의 해외공연과

1천 회가 넘는 국내 공연의 기록을 가진, 한국연극의 대표작품이라고 한다.

 

출연배우 : 이호성(블라디미르), 박상종(에스트라공), 정나진(포조), 박윤석(럭키), 김형복(소년).

 

 

산울림 소극장 입구

 

소극장 산울림은 객석이 적고 장소가 협소해, 배우와 관객의 숨소리를 서로 감지할 정도.

극장에 들어서면, 언제나 그렇듯 푸른 조명 아래 꼬부랑 휘어지고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인적도 없는 시골길 나무 아래 처량하게 앉아 있는 고고는 낡아빠진 구두를 벗으려 애쓴다.

디디가 뒤이어 등장하며 그들의 지루하고 가닥없는 대화가 시작되는데...

하염없이 기다리는 [고도] 도대체 그는/그것은 누구/무어란 말인가.

 

극의 내용은 원작을 읽어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http://blog.daum.net/hun0207/13291550

 

럭키를 맡은 박윤석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인상적이던지,

그리고 소년 역을 맡은 소년배우 김형복도 코믹하고 인상적인 얼굴. ㅋㅋㅋ 금년 공연 전, 공개모집한 소년배우란다.

박윤석씨(럭키 역)는 서구적인 용모에 가느댕댕.. 누워있을 때 소매자락 밖으로 들어난 그의 손목은 마치 부러질 것 같은..

바람에 쓰러질 듯 가느다란 체구로, 훤칠하게 큰 키에 어깨는 구부정히 무릎은 약간 굽힌 채 서서

몇십분(아니, 한 시간이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공연 시간이 150분이나 되니)을 무거운 가방을 양손에 들고 부동자세로.

바르르 떨리는 그가 참으로 안쓰럽기도. 가뜩이나 안쓰러운 역할인데.ㅎ

구부정하게 서 있기만 하던 그가 마침내 읊어대는 긴 대사는 압권!!ㅋㅋ

매우 빠른 속도, 그럼에도 분명한 발음, 휑한 무표정, 감동이었다,

포조가 럭키의 눈물을 닦아 주는 장면에서 박윤석 씨의 눈에는 눈물이 비쳤었지.(그의 얼굴엔 땀 범벅)

 

매우 연극적으로 연기하고 대사를 치더군. 모든 배우들이.ㅋ 이 연극은 그래야 맛이 나기도.ㅎ

최형인 교수는 그런 극적인 대사 읊조림을 지양한다던데. 연극대사도 평상 대화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큰딸이 한 때 최형인교수에게 연기수업을 받던 세월이 있었다.

김명곤씨에게도 뭔가를 배울까 싶어서 극단 아리랑에도 입단 하더니, 배울 기회는 없고..실망도 하고...

파리로 갔더라는 전설.ㅎㅎ

 

내 관극 후기는... 생략.

참고 될 자료를 검색해서 올린다.

 

 

[ 고도를 기다리며 ]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를 유명하게 만든 연극이었다.

이것은 이른바 ‘부조리극(theatre of the absurd)’에 속한다.

‘부조리’란 말은 이 경우-일상어에서 말하는 것처럼-우스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질문과 연관된다.

부조리극이 이 문제의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부조리극 작품들은 깊은 나락의 염세주의와 기괴한 유머가 독특하게 뒤섞인 형태가 된다.


 

소극장 산울림 입구


『고도를 기다리며』 의 줄거리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기다림’이다.

베케트는 이 작품으로 희곡에 거는 모든 관습적인 기대를 깨버린다.

『고도를 기다리며』 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심오한 특성의 인물들은 없고 우스꽝스런 인물들이 등장한다.

위대한 독백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는 피상적으로 이런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허튼소리라는

인상을 주는 언어가 놓인다.

두 남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한 국도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Godot)라는 이름의 어떤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도라는 인물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그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며,

그가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는지도 그가 언제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실제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서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들의 시도는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들의 얘기는 서로 지나치게 되고, 오해를 낳고, 도중에 끊어지며, 반복되고, 돌연 다른 주제로 옮겨가며, 질문을 발언처럼 다룬다.

그러니까 그들의 행동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어떤 막다른 골목의 끝에 다다르게 되고, 여기서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돌아서서 새로 달리기 시작하며,

다시 그곳에서도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또다시 돌아서 달리며 우왕좌왕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가 파리에서 (1953년에) 초연되고 4년이 지난 후에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샌틴 감옥에서 상연되었을 때

재소자들은 이 작품이 그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으로 믿었다.

여하튼 그들은 유럽의 대도시에 있는 진보적인 극장들을 찾는 관객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져주었던 이 작품에서

단번에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196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는 현대의 종지부를 보여준다.

『고도를 기다리며』 는 기다림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질문에 그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통해

대답을 돌려주고 있다. (에셔 M. C. Escher의 그림들을 연상시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미의 이런 순환은 포스트모던을 인식할 수 있는 표시로 여겨진다.

하지만 베케트에게는 항상 향수와도 같은 희망이 있는데, 기다림은 아마도 ‘어떤 특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기다림은 고도라는 특정한 이름을 지닌다.


내용 출처 :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 책』

 



 


[예스 인터뷰 >김경주의 극장뎐]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 :


김경주 : 아직도 연극이나 문학에 관심 있는 관객이나 독자들은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서 매혹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들은 부조리극에 대해 낯설거나 어려워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고 또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서도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부조리극이라는 것은 어떤 걸까요?

임영웅 : <고도를 기다리며>를 평생 연출해 왔지만 나는 부조리극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 연극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늘 기본적으로 연극을 하면서 고민하는 게 연극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라는 생각이에요. 그것이 어떤 종류의 연극이든 간에 개인의 개성이나 환경이야 다를 수 있어도 여하튼 주인공은 사람이란 말이야. 결국 연극은 사람 이야기기를 무대 위에 펼쳐놓는 거다는 거죠.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그 연극을 보고 ‘나는 잘 살고 있느냐, 어떠냐’ 그런 걸 생각하는 게 연극이 아닌가 해요. 그러니까 무슨 부조리극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여긴다거나 딴 세상 이야기로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선 좀 우스워졌어요. ‘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사람 사는 이야기로 그냥 풀면 되는 거다’ 라는 생각으로만 <고도>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김경주 : 말씀을 듣다보니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해 오신 선생님의 연출방식이나 철학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요.

임영웅 : 맞아요. 나는 만드는 입장에선 ‘부조리’라는 단어에 갇힌 적이 없어요. 부조리고 뭐고 하는 그런 말은 공연을 본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주인공의 삶이 참 부조리스럽구나 라고 얘기하는 거지, 부조리 연극에 나오는 인간은 인간 자체가 부조리한 사람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환경이라든지 그런 구조들이 원래 부조리할 수는 있겠지만 내 연극이 그런 건 아닌 거죠. 그래서 난 그냥 이건 어려운 연극으로 갈 필요 없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얘기처럼 보이는 이 작품을, 다시 말해 특별한 줄거리도 없이 흘러가는 연극이지만, 작가의 의도는 세상을 좀 웃기려고 쓴 거다. 그러면 작가의 의도대로 웃기는 연극이면 웃기는 연극으로 하자. 그러면 관객들은 연극을 보면서 무대 위에서 두 떠돌이가 하는 행위가 바보 같기도 하고 해서 웃기도 하고 ‘저런 바보 같은 자식들’하고 웃으면서 연극이 끝났을 땐 ‘어디에서 많이 본 인물 같은데 나도 저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도 해보는 거고 ‘사람 산다는 게 덧없고 아무 희망도 없고 그런 거 아닌가 고민도 해본다는 거지. 사람이 사람 속에 있다는 이야기가 부조리적인지 아닌지는 내 쪽에선 별 상관없어 보입니다.

임영웅 : 나는 다른 사람들 것을 보고 어쩌고저쩌고는 안 해요. 그건 그 사람의 고도죠. 다만 <고도를 기다리며>는 상당히 음악적인 작품이에요. 그런데 이를테면 모든 연극이 있지만 특히 리듬이, 극의 흐름의 리듬이 아주 음악적이라고요 극 자체로 상당히 리드미컬한 연극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연출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상당히 음악적인 부분에 집중해 있지만 정작 음악은 하나도 안 썼거든요. 일반 연극에서 쓰는 음악이라든지 효과음이라든지 이런 걸 하면 드라마틱해진단 말이에요. 그건 작가가 원하는 바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연극할 때 음악을 많이 쓰는 편인데도 <고도를 기다리며>는 효과음 하나도 안 씁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의 대본을 보면 침묵하고 휴지하고 다르게 표현되잖아요. 작가가 그렇게 세심하게 생각을 하고 썼기 때문에 가능한 그걸 살리려고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원작에서 한 자도 빼지 않고 원전 그대로했어요. 침묵까지도.


http://blog.daum.net/hun0207/13291550  블벗 동우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un0207/13291553  이 페이지 댓글난에 있는 동우님의 후기를 읽어 보시면, 아마도 완독하고픈 욕심이....^^

 

원작을 네 번으로 나누어 올려 둔 방으로 가서 꼭 읽어 보세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읽어 두든, 봐 두든, 해야죠? 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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