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씨 뿌리는 사람>,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

eunbee~ 2012. 8. 3. 07:42

 

반 고흐의 <씨뿌리는 사람>1888년 6월,  캔버스에 유채, 64.2 x 80.3cm

 

베르나르에게

 

요즘은 고갱과 자네와 내가 같은 곳으로 가지 않은 게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네.

고갱이 이곳을 떠났을 때는 내가 다른 데로 옮길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고, 자네가 떠날 때는 짜증스럽게도

돈 문제가 걸려 있었지. 그래서 내가 이곳이 생활비가 많이 든다고 전하는 바람에 자네가 오지 못하고 말았네.

우리가 모두 아를르에 왔더라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우리 세 사람이 같이 지낸다면 가사일도 함께할 수 있었을 테고, 이제 이곳 사정에도 밝아지고 보니 함께 지냈더라면

득이 되었을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되네.

 

나는 북부지방에 있을 때보다 잘 지내고 있네. 그늘이 전혀 없는 한낮의 밀밭에서 작업하는 게 매미처럼 즐겁네.

서른다섯 살이 되어서가 아니라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이곳에 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 당시 나는 회색이나 색이 없는 것에 빠져 있었네.

늘 밀레를 꿈꾸었고 모베나 이스라엘스 같은 네델란드 화가들과 사귀곤 했지.

 

<씨뿌리는 사람>의 스케치를 보내네. 흙을 온통 파헤친 넓은 밭은 선명한 보랏빛을 띠고 있네.

잘 익은 보리밭은 양홍빛을 띤 황토색이고.

하늘은 황색1호와 2호를 섞어서 칠했는데, 흰색이 약간 섞인 황색1호 물감으로 색칠한 태양만큼이나 환하네.

그래서 그림 전체가 주로 노란색 계열이라네. 씨 뿌리는 사람의 상의는 파란색이고 바지는 흰색이네.

크기는 정사각형의 25호 캔버스.

 

노란색에 보라색을 섞어서 중성적인 톤으로 칠한 대지에는 노란 물감으로 붓질을 많이 했네.

실제로 대지가 어떤 색인가에는 별로 관심이 없네.

낡은 달력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거든.

나이든 농부의 집에서 볼 수 있는 달력에는, 눈이나 비가 오는 장면이나 날씨 좋은 날의 풍경이 아주 유치한 양식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나. 앙크탱이 <추수>에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런 양식 말일세.

솔직히 내가 시골에서 자라 그런지 시골 풍경에 대해 반감은 전혀 갖고 있지 않네.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은 아직도 나를 황홀하게 하며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을 갖게 한다네.

씨 뿌리는 사람이나 밀짚단은 그 상징이지.

 

언제쯤이면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

멋진 친구 시프리앙이 말한 대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서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서 꿈꾸는,

그러나 결코 그리지 않은 그림인지도 모르지.

압도될 것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완벽함 앞에서 아무리 큰 무력감을 느끼더라도 우선 시작은 해야겠지.

 

<황혼의 밀밭> 73.5×92cm 1888년 6월, 캔버스에 유채

 

또 하나의 풍경 스케치를 편지에 했는데, 해가 지는 것처럼 보이나, 달이 뜨는 것처럼 보이나?

여하튼 여름 태양이네.

마을은 보랏빛이고, 태양은 노란색, 하늘은 청록색이네.

밀밭은 오래된 황금빛, 구릿빛, 녹색을 띠는 황금빛, 혹은 붉은 황금빛, 노란 황금빛, 노란 청동빛, 적록색 등 모든 색을 담고 있네.

크기는 정사각형의 30호 캔버스네.

 

미스트랄(지중해 연안에서 부는 북서풍)이 한창일 때 이 그림을 그렸는데, 오죽했으면 이젤을 말뚝으로 고정해야 했네.

이 방법을 자네에게도 권하고 싶군. 이젤 다리를 흙속에 박고 50센티미터 길이의 말뚝을 그 옆에 박았네.

그러고는 이 모두를 로프로 묶어야 했네.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어도 작업을 계속할 수 있지.

 

흰색과 검은색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씨 뿌리는 사람>을 예로 들겠네.

이 그림은 위쪽 절반은 노란색, 아래쪽 절반은 보라색,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네.

그럴 때 노란색과 보라색이 너무 지나치게 대조되어 거슬리는 면이 있는데, 바지를 하얀색으로 칠해서 눈이 쉬게 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보내게 해준다네. 이걸 말해 주고 싶었네.

 

<씨 뿌리는 사람> 반 고흐, 1888년 6월.

 

고갱도 퐁타방에서 지내는 게 싫증이 났는지 자네와 마찬가지로 외롭다고 하더군.

자네가 그를 한번 만나러 가도 좋을 텐데. 그런데 그가 계속 그곳에 머무를 생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

파리로 갈 것 같기도하고.... 그는 자네가 퐁타방으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더군.

우리 세 사람이 여기에서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자네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할지 모르지. 사실 멀기는 하지만 겨울을 생각해 보게.

이곳에서는 일년 내내 일할 수 있다네.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도 혈액순환을 막거나, 아무 일도 못하게 하는 추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네.

 

1888년 6월 18일.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기고 엮음- 중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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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mile Bernard

1868년-1941 (프랑스 )클루아조니슴의 창시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오딜롱 르동 및 폴 세잔 등의 화가들과 가까이 지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86년에 그는 퐁타방으로 가서 형태를 검은 윤곽선으로 분할해 대담하게 그림을 그리는 클루아조니슴 양식의 이론을 확립했는데 이 양식은 고갱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조각과 목판화도 제작했으며 가구와 태피스트리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또한 신비주의와 철학을 연구한 시인이자 문필가이기도 했다. 세잔르동이 명성을 얻은 것은 베르나르가 그들의 초기 작품을 보고 감탄하면서 그들이 위대한 화가가 되리라고 예언한 덕분이기도 하다. 그는 1894년에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그후 10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았다. 1904년에 프랑스로 돌아온 뒤 〈레노바시옹 에스테티크 La Rénovation Esthétique〉라는 평론지를 발간하는 한편 반 고흐, 고갱, 르동, 세잔과 나눈 편지를 묶어 서한집을 출판했는데, 이 서한집은 근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 1850년 작

 

1885년에 네덜란드를 떠난 반 고흐는 밀레의 그림 <씨뿌리는 사람>을 자주 모사하였고,

나중에 프랑스 아를르에서 <씨뿌리는 사람>을 그린다.

 

***

 

2012. 8. 3.  0시 23분  아름답게 떠있는 달.

 

어제 밤, 아니 오늘 새벽 0시를 지난 시각

은비랑 나는 달이 예뻐서 베란다에 나와 달과 놀았다.

달빛이며 달 모양이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구름은 참으로 황홀했다.

베란다에 러그를 펴놓고 누워서 달을 보고 있는데, 휴대폰 문자오는 기척.

열어보니, 멀리 헬싱키에서 막내올케가 보낸 소식.

"고모님이 가장 기뻐하실 것 같아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합니다. 국가가 저를 이제 그만 놓아준다네요."

막내올케는 퇴직을 하려고 명퇴신청서를 세 번째 제출. 드디어 올 8월로 퇴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

막내올케가 명퇴신청을 한 첫해부터 우린 함께 여행갈 꿈을 무던히도 꾸며,계획도 세웠었다.

그런 우리의 꿈을 번번히 깨트리더니....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10 : 06 은비가 찍은 것

 

 

이제 우리는 반 고흐가 그리던 '까마귀 나는 밀밭' 가에서 함께 황혼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프로방스에도 루아르강변에도 노르망디해변에도...함께 갈 수 있게 됐다. 앗싸~

무엇보다도 우리가 함께 Parc de Sceaux를 맘껏 거닐 수 있게 되었네. 오호홍~

 

막내올케가 자신의 명퇴소식을 유럽에서 들을 수 있는 세월도 좋고,

그 첫소식을 헬싱키 공항에서 내게 전해 줄 수 있는

이 편리하고 좋은 세상이 신기하다.ㅋㅋ

오늘 새벽 막내네 부부는 돌아오는 비행기에 오른다는 소식도 함께 보내왔다.

 

막내 올케 님의 명퇴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이제 생애의 다른 페이지를 열며, 또다른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된 그녀의 앞날이 더욱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고, 고마웠고, 많이 미안했어요. 인수씨!!

우선 모든 것 내려놓고 푹 쉬세요. 한동안은....

그리고 새로운 '씨를 뿌리고',  꿈꾸고, 하고 싶어 하던 '동경'을 현실로 이루세요!! 인수씨!!!"

 

긴 세월동안의 그녀의 노고를 잘 알고 있는 나는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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