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아랫동네엔 우리큰아버지네 집이 있었다.
부석면 소천리에서 가장 복잡한 거리의 커다란 대문에 마당 너른집.
유난히도 키가 작은 큰엄마랑 기골이 장대하고 고집센 큰아버지가 사시는 높다란 기와집.
한국전쟁 때 우리가족이 큰아버지댁으로 피난을 가서 사촌오빠와 언니들 틈에 섞여
바글바글 대가족이 몇달을 함께 지냈다. 피난을 얼마나 호강스럽게 했는지 집으로 돌아올 생각않고 있다가
뒤늦게 문경세제를 넘어 우리집으로 돌아오니, 동네사람들이 아예 큰댁에서 자리잡고 사는 줄 알았다고 하더란다.
예닐곱살 적 이야기이니 나야 기억나는 일들이 매우 단편적이다.
이번 여행을 함께 떠난 동생과 내가 각각 중.고등학교 다닐 적 어느해 여름방학 때 큰댁에 오다가
장마로 다리가 끊겨 버스마저 끊기게 되니 먼길을 걸어서 오던 더운 여름날이 있었다.
그날의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큰아버지댁엘 왔다. 큰아버지댁의 집은 헐리고 그자리에 교회가 들어섰다.
허무하고 서운하다. 그 옛날 우리남매가 걸었던 순흥에서 부석면으로 오는 길가에 서 있던 몇백년 된
느티나무는 그대로 무성하던데, 우리큰아버지네 집은 없다.
큰아버지집은 대문 하나에 쪽문이 두개 있었다. 오른쪽 쪽문으로 나오면 개울이다.
그 개울에 장마로 물이 불어나 흙탕물이 넘쳐흐르던 기억이 아련하고, 개울물이 맑아진 날 빨래를 하던
생각도 난다. 그 넓어보이던 개울이 지금 보니 이렇게 좁다니... 쪽문에서부터 개울까지 놓여진 돌층계를 나는 무척 좋아했다.
사라진 돌계단이 가버린 세월 속에서 아직도 층층이 놓여있다. 그 때의 개울물 소리가 마음 아래로 흘러간다. 그립다.
큰아버지댁 대문이 있던 자리엔 교회문 기둥이 서있다.
대문 열고 들어서며 '큰엄마~'라고 외치던 내목소리도 들린다.
아쉽고 서운하고 많이 그립다. 세월은 어느새 이렇게 갔을까.
서울사대인지 문리대인지를 졸업한 큰집 오빠는 교직에 있느라 큰도시로 나가고
사촌언니들도 결혼을 하여 집이 허전해지자 큰아버지네는 과수원을 장만해서 소백산자락에서 노년의 세월을 보내셨다.
부석사에서 걸어내려와도 그리 멀지않은 곳이다. 내 막내동생이랑 80년대 중반에 큰아버지네 과수원으로
두분을 뵈러 왔었다. 그것이 그분들을 뵌 마지막날이 되었다. 부석사에서 내려오며 도라지를 서너 뿌리 캐와서
큰엄마에게 드렸더니, 남의 밭에서 캐온 것 아니냐고 하시며 웃던 큰엄마 모습이 그립다.
동그란 소반에 큰아버지는 독상을 받으시고, 큰엄마랑 막내동생이랑 나는 큰상에서
산골의 소박한 저녁밥을 먹던 기억이 난다. 그날이 그분들을 뵌 마지막이 되었다.
큰아버지 큰엄마가 보고 싶다.
부석사에 다녀온다고 하더니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오는 우리를 큰길까지 나와서 기다리며
'야들아~ 이제 오노~' 하시던 큰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아무도 살지않는 빈집이 쓸쓸하다. 과수원도 쇠락해져서.. 사과나무 몇그루가 쓸쓸하다.
일꾼두고 농사 짓던 그때는 사과나무도 많더니... 그때의 사과나무인가 싶어 가까이 가서 꽃냄새 맡아보고
나무둥치 어루만져 본다. 그러는 내마음도 쓸쓸하다.
뒤꼍으로 가서 먼산을 건너다 본다. 모두들 세월따라 사라져 가는구나.
그리움에 목구멍이 싸아~해 온다.
누가 심어 두었는지 두릅나무가 제법 키를 키웠다.
산 입이라고.. 먹고 살겠다고...두릅을 딴다. 큰아버지네가 나에게 선물하신거야 라면서...
이제껏 큰엄마 큰아부지 생각하며.. 그옛날 생각하며.. 눈물 글썽이던 내가...
산다는 건 때때로 이렇게 웃기는 일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상복을 입고있는 날에도 밥은 먹었으니...
봄볕 곱고 민들레가 애처로운 날
가버린 부모님들 모습과 가버린 세월을 되새김 한다.
큰아버지 옛집 뒤꼍에서 동생 몰래 울었다.
옛생각이 외로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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