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se.Theatre

Andre Kertesz사진전

eunbee~ 2011. 1. 12. 20:35

 

 

토요일부터 주말 휴일이 시작되는 파리의 직장인들은 주말을 전시장이나 영화관 콘서트장에서 보내게 마련이지요.

날씨 좋은 날에는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지만 요즘 날씨는 그렇지 못하니 뮈제나 갈르리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우리 모녀도 자주가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콩코흐드광장 옆의 죄드폼 국립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에 가기로 했지요.

  

 

죄드폼 국립갤러리Galerie National du Jeu de Paume로 헝가리 출신의 사진작가 앙드레 케르테츠 사진전을 보러갑니다.

뛸르리 정원을 따라 콩코흐드광장쪽으로 오면, 오랑주리 건너편에 갤러리가 있지요.

Galerie National du Jeu de Paume은 19세기~20세기의 사진과 영상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전을 여는 전시장입니다.

 

 

 

서쪽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덮였으나, 뛸르리 공원 잔디밭에는 축구에 한창 열을 올리는 소년들로 활기롭습니다.

큰딸이 말합니다. '이 애들은 뛸르리정원에서 축구를 하는구나.' ㅎㅎ 행복한 소년들이라는 말이겠지요.

 

 

Jeu de Paume 갤러리로 가려면 조금더 걸어야 겠네요.

콩코흐드광장의 오벨리스크는 잿빛 하늘 속에서도 빛납니다.

 

 

Jeu de Paume국립갤러리로 오르는 계단에는 이러저러한  '군중'들이 우릴 반기지요.

 

Place de la Concorde, Paris,  1928

 

Andre Kertesz (1894-1985)는 헝가리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 등지에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1925년-1936에는 프랑스에서 활동을 하고. 그 후 1936년~1985까지 뉴욕에서 활동을 합니다.

 

'콩코흐드 광장'이라는 작품은 그의 사진집에서 옮겨 담은 사진이에요. 사진집 표지 사진입니다.

 

Elisabeth et moi, 1933,   엘리자베스와 나

 

앙드레 케르테츠와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앙드레 케르테츠는 부인을 무척 사랑했나봐요. 그녀가 죽고 난 후 케르테츠가 늙어서 유작처럼 남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작업한 작품은 엘리자베스를 추억하며, 그 사진속에 아내를 재현시키는 작업을 했습니다.

노년에 창가에 앉아 유리인형에 맺히는 상을 보며 아내에 대한 사랑을 추억하며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 갔지요.

알렉산더 칼더.

 

큰딸네 집에는 칼더의 모빌이 침실에서도 거실에서도 뱅글뱅글 돌고 있다우.

우리는 케르테츠의 사진들 속에서 칼더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와우~중후하게 생겼군,하면서 반가워했어욤~ㅎㅎ

케르테츠가 파리에 와서 활동할 때엔 많은 예술가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가졌더군요.

 

포크.1928.

 

Andre Kertesz의 작품 중에 참으로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어요.

군더더기 없는 세련된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La Martinique, 1er janvier 1972  마르티니크 섬, 1972년 1월 1일

 

이 작품은 큰따님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사진집에서 옮겨 담았습니다.

전시장에는 '노~포토'입니다.ㅋㅋ

 

Washington park

 

하얀 눈위에, 발자국들과 바퀴가 지나가며 만들어낸 선과 점들이 이룬 무늬가 참으로 좋았는데,

옮겨놓으니 별 효과가 안나네요.ㅠㅠ

 

앙드레 케르테츠는 우리모두 누구나 찍을 수 있는 평범해 보이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유난스럽거나 어렵거나

별난 시각으로 피사체를 괴롭힌?것이 아니라, 사진들을 보면 마치 평범한 우리네가 찍은 것처럼

따스하게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겨오는 그런 사진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카르티에 브레송은 말 하지요."우리가 해 온 것은 모두 다 케르테츠가 처음 했던 것이다."라고..

 

 

이 작품 역시 '워싱턴 파크'였지요...아마~

케르테츠는 르포르타주적인 사진 시각과 시각적,조형적인 것들이 하나로 융합된 사진을 창출해 냄으로서

현대 사진의 새로운 시각의 가능성을 예견했다고 후대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Melancholic Tulip 1939

 

제목이 재미있고, 간결하고 평범한 것 같은 사진이 그의 사진이라는 것이 신기해서(반가워서^^) 옮겼습니다.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말년에 그는 창가에 앉아서 유리인형에 비친 창밖의 사물들을 찍었습니다.

 

1982년 프랑스 최고의 레지옹 드 뇌르 훈장 수상 때,"지금은 너무 늦어버렸다.엘리자베스는 이제 없다. 이런 것은 어찌 되어도 좋다."라고 말해

아내에 대한 사랑과 아내의 부재에 대한 슬픔을 나타냈습니다. 노년에 그는 우연하게 선물받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그가 어느 가게 앞에서

발견한 유리세공의 인형을 놓고 작업을 했답니다. 그 유리인형은 마치 엘리자베스를 보는 듯했습니다.

목이며 어깨선이 그녀와 꼭 닮았다고 느껴져서 사 왔다고 합니다.그는 창가에 유리인형을 놓고 반복하여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유리에 비치는 창밖의 세상을 찍었습니다. 엘리자베스와 함께 하는 시간들을 만들어가고, 그녀와 함께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이 [나의 창가에서]라고 이름 지어진 시리즈는

케르테츠가 죽는 날까지 30년이상 살았던 워싱턴 광장이 보이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아파트 12층 방

창가에 놓여진 유리와 세라믹 오브제들을 다양한 빛속에서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전시장 한 켠에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따로 모아져 전시되었습니다.

 

 

Andre Kertesz는 '변형(왜곡)'이라는 제목으로 많은 작품을 번호로 표시하며 작업을 했더군요.

마치 요술거울 속에 비치는, 오목렌즈와 볼록렌즈의 마술처럼 사진의 실체를 늘이고 당겨서 부드럽고 변화무쌍한

상을 창작해 냈습니다. 지금부터 여인의 몸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감상하시겠습니다.

사진의 마술~~

 

 

 

왜곡된 인체의 조형미는 초현실적인 요소가 배어있습니다.

 

 

 

재밌죠? 부드러운 곡선들은 더욱 부드러워보이고,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가 더욱 매끄러운 느낌을 가져다 줍니다.

 

그의 사진들이 정말 많았는데, 내 눈에는 그냥 평범?해 보였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뉴욕에서의 활동까지

총망라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얼마나 많겠어요. 우리가 흔히 찍는 그런 사진들을 보는 것 같기도 했지요.

사진에 대해서 모르니까, 그렇게 보였겠지요. '맨하튼 브릿지'라는 사진 앞에서는 블로그 친구 '곰아저씨'의 사진이랑

너무 닮아서, 곰아저씨 생각을 했다우.ㅋㅋ

 

거리의 풍경, 가족과 그가 함께 찍은 사진들, 서민적인 시각에서의 사물에 대한 성찰, 그럼으로서 전해져 오는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들이 참으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진전이었습니다.

 

 

사진전을 보고 나와서 내가 사진을 찍으니, 참 기분이 묘했습니다.

죄 드 폼 갤러리에서 밖을 보니, 대관람차의 하얀 불빛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우. 와~~

내 큰따님의 얼굴도 살짜기 나왔네요.

 

 

실내에서 창밖으로 보는 불빛들은 겹치고 분산되어 다른 느낌을 주던데

내 실력과 내 디카의 한계입니다. 이 사진이....ㅠㅠ

 

 

두시간 이상을 사진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오니, 이미 밤은 사방을 휘감았고, 비는 주룩주룩...

콩코흐드 광장은 휘황한 불빛들로....멀리 에펠탑 꼭대기에서는 빛줄기를 빗줄기 속으로....ㅋㅋ

비 내리는 파리의 심장부가 나에게 반짝반짝 윙크를 보내고 있었지요.

 

 

어느날 공원에 앉아서, 딸과 엄마가 이야기를 나눕니다.

"얘, 나는 사진이나 그림을 배워서 잘 하고 싶어. 그런데 너무 늦은 것 같아."

"엄마, 엄마가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NASA로 진출하고 싶어~]

 얘기가 그렇게 된다면야 늦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진이나 그림을 배우는데 왜 늦었다고 생각해? 반 고흐가 되려고 배우는 것도, 카르티에-브레송이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즐겁게 즐기려는 것인데, 늦은 게 어디있어?  게을러서 못하겠다고 말하시지~" (두 모녀 박장대소 했음)

 

"헤이, 따님~그런데 내 사진이 옛날 여행다닐 때보다 많이 발전하지 않았니?"

"그 건 맞는 말인데,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카메라 성능이나 기능이 좋아진 때문이야~" (하하하하~또 한바탕 웃었지요)

지난 가을 어느날,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서 나와서 그 앞 공원에 앉아 우리 모녀가 나눈 이야기입니다.ㅋㅋㅋ

 

하고 싶은 것도 무지무지 많고, 해본 것은 더 많고 많은데 잘하는 것이 없는 내가 오늘도 이렇게

'잘 하는 것보다 즐기며 사는 게 더 좋아~'하면서  홍~홍~~~ 살고 있습니다요.^*^

***

전시장 벽에 쓰여있던, 앙드레 케르테츠의 말 중 내 마음에 쏙들던 한마디를 옮깁니다.

 

I regard my self as an amateur today, and I hope that's what I will stay until the end of my life.

Because I'm forever a beginner who discovers the world again and again.

 

더보기

앙드레 케르테츠는 189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서점을 경영하고 있던 아버지는 그가 15세가 되던 해 타계했다.

소년 케르테츠를 처음으로 사진에 매혹시킨 것은 친척집 다락방에 지면을 펼치자 먹을 것, 탈것, 인물, 풍경 사진이 담겨져 있어 그 산뜻함이 그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어느 새인가 자신도 그러한 사진을 찍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후 숙부가 후견인이 되고 부다페스트의 증권거래소 회계직원을 알선해 주었지만 일에는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고 처음 급료로 우선 ICA라는 box camera를 사서 자신의 주위사람들의 사진들을 차례로 찍기 시작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헝가리 육군에 입대 이때도 케르테츠는 등에 무거운 카메라와 유리 감광판을 지고
출진하여 전투 짬짬이 편히 쉬는 병사들과 출정하는 남편과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부인의 모습 등 전쟁의 일상을 계속 찍었다.
동시에 찍은 사진을 헝가리 잡지에 발표하여 그는 점차로 사진가로 국내에서 인정받게 된다.

머지않아 헝가리는 항복하고 케르테츠는 증권회사에 되돌아가서 회계업무를 재개하지만 사진에 대한 열의는 더욱 높아져 그의 호기심에 넘친 눈은 점차 사진표현의 새로운 영역으로 쏟아졌다. 예를 들면,케르테츠는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 사람들의 사진을 찍거나, 장시간 노출로 야간촬영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주말과 휴가를 모두 사진을 위해 쓰게 되었지만 어느새 인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파리에서의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한 일과생활담을 우연히 접해 듣고 본격적인 사진가가 되려고 1925년 파리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1925년이란 해는, 라이프찌히 산업박람회에서 라이카 A TYPE이 발표된 카메라 발달사상 기념비적 해이다. 영화처럼 35밀리 필름을
쓰는 이 소형카메라의 출현은 케르테츠를 비롯한 신세대 사진가에게 있어서는 어떤류의 사진혁명을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보다 액티브한
스냅. 쇼트를 위한 확실한 핀트맞춤, 빠른 셔터속도와 조리개 결정등. 오늘날 카메라의 원형이 이 해에 생겨났다고 해도 좋다. 케르태츠는
파리에 나와 처음 고향친구 회사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그 교우관계를 넓히고 막 나온 소형카메라를 사용하여 알게 된

화가와 소설가, 시인과 음악가등 문화인의 사진을 찍는 일을 하게 된다. 아뜨리에의 몬드리안, 가족과 피크닉을 가는 샤갈, 긴 의자에
앉은 코레트. 움직이는 완구를 조립하는 칼더 그리고 레제와 쟈코메티. 잣킹과 뷔라맹크.... 이러한 친구들의 대부분은 그의 아파트 근처에
있던 카페 돔에서 사귀었다. 케르테츠는 또 파리라는 도시 그 자체도 정력적으로 촬영하였고 에펠탑에서의 조망과 세느강변이 즐비하게
늘어선 집, 상점, 독자적인 앵글과 구도에 의한 매혹적인 많은 사진을 찍고 있다. 이렇게 하여 착실하게 사진 활동을 계속한 그는 1927년에
파리의 사크레.드.쁘랑땅화랑에서 최초 개인전을 열고 또 그 다음해 만 레이와 애보트, 아우터 브릿지등 파리 주재의 주목할 만한 사진가
들을 모아서 그룹전에 참가. 일약 케르테츠의 이름은 유럽 일류 사진가들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닷 탐탁스런 눈으로 보지 않았던
화가인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이때 케르테츠 사진을 보고 화실을 카메라로 바꾸었다고 말했다. 또 조각가의 길을 걸으려고 하고 있던
브랏사이에게 카메라를 빌려주어 기술적인 어드바이스를 주고 파리의 야경을 찍는 것을 계기로 만든 것도, 헝가리에서 무일푼으로 파리에
온 로버트, 카파를 따뜻하게 대접하여 사진의 초보를 가르친 것도 이 기백이 날카로운 사진가 케르테츠였다.

1930년대로 들어서자 케르테츠는 프리랜서 사진가로서 독일의 [베르리나 이르수트리르테]이탈리아의 [레.나츠이오네. 취오렌체],

프랑스의 [뷔], 영국의 [런던 타임즈]등의 신문 잡지에 활발히 사진을 발표하기 시작 [어린아이들] [케르테츠의 파리]라는 사진집을 출판, 브뤼셀. 뮌헨, 엣센, 슈토우트가르등의 도시에서 개인전을 열고 사진가로서의 그의 재능은 국제적이 되어갔다.
이렇게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활약하는 케르테츠에게 드디어 미국에서도 유혹의 손길이 뻗쳐 온다. 미국의 사진통신사 key stone. press의 디렉터인 어니 프린스가 1년 계약으로 뉴욕에서 일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활약의 야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 2의 고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파리를 떠나기 힘들어하는 케르테츠였지만 고민한 끝에 그 건을 승낙하여 1936년 미국에 건너가게 된다.

이해는 미국에서[life]가 창간된 사진미디어사상 epoke-making(새시대를 여는 획기적인)해이기도 하다.

***검색된 자료 일부를 올립니다. 글 쓴 이는 사진을 연구하는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