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se.Theatre

그랑 빨레에서의 모네전시회

eunbee~ 2010. 12. 30. 21:19

모네전 포스팅을 하며 생각한 일인데, 내가 미술 전시회를 보고 포스팅하는 일은 이제는 그만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유는 미술작품을 내 실력의 사진으로 옮긴다는 것이 무리이기도 하지만, 미술관에서 감상하면서 사진기를 들고 찍어대는 일은

참으로 민망하고 볼성사나운 일이라고 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럽사람들은 여간해서는 미술관에서 사진을 찍지 않지요.

더구나 파리지엥들은 질색일겁니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내 따님들도 질색인걸요.ㅋㅋ

아무튼^^ 각설하고,

그랑빨레엘 갔어요. 모네전을 보러... 나는 모네가 살던 지베르니에 가서 그가 살던집과 정원을 보며, 수많은 꽃들이 피어있는 모네의

정원과 연못과 일본식 다리를 참으로 마음에 들어 했었지요.  그리고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서도 '생 라자르 역' 그림앞에서 감격했고요. 

더구나 그가 즐겨 그림을 그리던 노르망디 에뜨르타 여행도 했으니, 이래저래 친숙하게 느껴지는 화가입니다.

 

 

내게 친근한 모네의 그림 중에 실물로 보지못한 그림들이 컬렉션되어서 전시회를 연다니 만사 재쳐두고 그랑빨레로 달려 갔습니다.ㅎㅎ

모네 포스터에 화살표가 보이지요? 그랑빨레를 왼쪽으로 돌아 모네전 건물로 갑니다. 사진에 보이는 출입구는 [프랑스 1500]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데, 어제 화요일엔 휴관이었습니다.

 

 

사진 프레임속으로 들어오지 않은 사람이 세 배가 넘습니다. 계단아래는 가이드라인이 두겹으로 되어있어 그곳만도 100명은 될 거예요.

 

 

저쪽 줄은 또 뭐냐구요? 인터넷 예매자 줄이에요. 내가 도착하자마자 찍은 것인데, 30분쯤 지나자 사람들은 곱으로 늘어났다우.ㅠㅠ

 

 

이런 거 저런 거 보면서 줄의 길이가 줄어들기를 기다립니다. 한정된 공간에 관람객을 수용하자니 인구밀도 조절을 위해 시차를 두고 입장시킵니다. 눈앞에서 발가벗고 비스듬히 누워 웃는 여자 때문에 더 추웠어요.^^  비는 오락가락하는데, 사람들은 우산을 폈다 접었다, 끈기있게 기다리더군요. 깔깔대고 농담하고 수다떨면서....앞에 서 있는 네 여자와 한 남자의 에스파냐어가 참으로 듣기 좋았어요.

 

모두 무료합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만큼이나 마음들도 우중충합니다.ㅎㅎ 그래도 기다림은 희망이 있어 좋아요.

 

 

파이프 문 남자 멋지죠? 남자가 아니라 파이프가 말예요. 그런데 저 남자가 멋져서 찍었냐구요? 저남자가 멋지냐 아니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저 장소에 올라 서 있다는 사실이 무척 중요한 순간입니다. 저곳에 올라 서려면 무려 두시간 반을 빗속에서 기다려야 했으니까요.ㅋㅋ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향해 줄을 서 있는 군중?들이 BOO~BOO~하기도  WOO~WOO~하기도 해요. 서로 웃자고 하는 것이죠.

인터넷줄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 같아 속상해서 하는 일종의 살짝 시위이기도 했어욤~ㅎㅎ 웃으면서 매우 가볍게...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겸연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지요. 참으로 재밌는 광경이었지요. 그나저나 난 파이프 문 모습이 멋져서 또 찍고...ㅋㅋ 아니,파이프가 멋져서..^*^

 

 

내 뒤로 줄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내 뒤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숨소리는 거칠어지기 시작했고요. 너무 추운가 봐요. 가엾어라~

예닐곱살 어린 소년 소녀부터 팔십이 됐음직한 할머니까지 굳세게 참고 서서 기다립니다. 추위속에서도 표정은 행복했지요.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은, 그리고 잠시후에 만나게 될 보고 싶은 것과의 만남이 주는 기대는 추위도 긴 시간의 기다림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거리의 음악가 때문에 긴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지요. 귀에 익은 오페라의 음악들을 멋지게 연주하고 있습니다.

추운날씨에 시린손을 참아내며 연주하는 분께 고마운 마음에서 동전통에 동전을 넣었지요.

이제 우리도 몇 분 후엔 계단을 오를 수 있습니다.

 

 

관람은 윗층부터 시작됩니다. 모네가 노르망디 에뜨르타에 살면서 그린 에뜨르타 해변입니다. 이 해변으로 여행을 한 적이있는 내겐

친근하고 반가운 풍경이지요. 에트르타에 가면 바로 이 풍경을 그렸던 모네가 앉아있던 해변길이 '끌로드 모네 길'입니다.

 모네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나 기타 사항들은 내 안목과 식견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니, 김광우님의 그림읽기를 보시던지, 아니면 그림에

관한 책을 보시는 편이 정확하고 믿을 만합니다. 모네는 에뜨르타에 살던 시절이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 부유한

마담 고디베르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지만요.

 

La Pie 1868-1869 까치

 

이 작품은 내가 처음 그림을 배울 때 모사를 하던 것인데, 요즘도 역시 이그림을 모사하고 있답니다. 수채화로 모사하기에 적당하다고

내맘대로 판단하고는 눈밭에 흩뿌려진 푸른 빛들을 따라 나타내 보느라 애쓰고 있지요.ㅋㅋ

이렇게 나는 내 얘기로 모네전을 이어가려 합니당~호홋

 

Regates a Argenteuil 1872  아르장퇴유의 보트경주.

 

모네는 아르장퇴유에서 그린 그림이 많아요. 아르장퇴유는 파리근교의 작은 마을입니다.

센느강변의 풍경을 그리기도 하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이름을 가진 마을에서 빛을 좇아서 그림을 그립니다.

아르장퇴유는 은빛으로 빛난다 라는 뜻이라네요.

 

                  Le Pont d'Argenteuil 1874 아르장퇴유 다리

 

이그림은 사연이 담겨있어요. 몇년전에(3년전?) 괴한들 너댓 명이 뮤제 오르세에 와서 주먹으로 이 그림을 쳐서 훼손시켰다네요.

60.5*80cm의 그림에 10cm가 찢어지는 일이 벌어졌다니.... 그러나 내가 본 이작품에는 전혀 표시가 안나더군요. 다행이죠?

괴한이라고는 해도 술취한 정신나간 취객일 수도 있다고 해요. 여자 한명도 끼어있다는 소문도 있고요.ㅎㅎ

 

La gare Saint-Lazare 1877생 라자르 역

 

이그림은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것을 가져온 것이며, 마르모탕 미술관에 가면 이것과는 색채와 느낌이 다른 생 라자르 역La gare Saint-Lazare작품이 있는데, 나는 마르모탕에서 그 작품을 보고, '모네 그림들 중에 제일 좋다'고 감상을 말한 적이 있었지요. 이번 전시회는 캐나다, 미국, 프랑스의 지방도시들에서 많은 작품을 빌려 왔더군요. 특히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시카고,보스턴,필라델피아, 인디아나폴리스 등지의 미술관에서 대여해 온 모네의 작품이 많았습니다. 캐나다의 온타리오,토론토, 오타와의 미술관 소장품도 몇점 있고요. 가까운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작품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La Plage de Sainte-Adresse temps grils 1867  회색빛 무렵 생트-아드레스의 해변

 

나는 이 그림이 좋았어요.하늘 가득한 구름의 은빛 반짝임과 푸른 바다에 잠긴 하늘빛과 푸른 조각배, 그리고 정다운 사람들...

해변에 앉아 먼곳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사람...

모네의 빛의 마술이 담겨있어서 좋았던 그림이에요. 그림제목은 내가 그냥 번역한 것이니 참고하삼~^*^

 

 

1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2층 전시장은 짧은 통로를 지나쳐 다음 방으로 이어집니다. 벽면에는 모네의 생전의 생활을 담은 대형사진들을

부착해 두었습니다.

 

 

부모를 따라나선 소년이 잠시 눈도 다리도 마음도 쉬고 있네요. 아이들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가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ㅋㅋ 은비 역시..^*^

 

Etretat, mer agitee 1883  에트르타, 거친바다

 

그런데 이그림은 약간의 억지가 있어요. 바닷가에 짚가리가 있다는 것이 어색하고,에뜨르타에 가면 바닷가에는

절벽이라서 짚가리가 생산될만한 논밭이 없으며, 자갈들이 차르르~대며 파도에 씻기우는 장소에 짚가리라니요.

130여 년전 이야기라고 해도 말이죠. 모네는 1872년에 에트르타로 가서 얼마동안 살았는데, 1883년에 그린 에트르타가 있는 걸 보니

자주 가서 그림을 그렸나 봐요.

 

 Fragment du Dejeuner Sur l'herbe 1865 풀밭위의 점심식사의 단편

 

이그림에 등장하는 여인 모델이 까미유입니다.1865년에 까미유는 모네의 모델이 되지요. 이그림속에 그려진 것이 그녀가 모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첫 작품입니다.이 후 둘은 급속히 가까워지며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함께 살게 되지요.2 년후 아들 장Jean을 낳고,둘의 사랑은 변함없이따스하고 아름답습니다.모든 그림의 여인들이 거의가 까미유를 모델로 한 그림입니다.[정원의 여인들]이란 그림에는 세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 여인들 하나 하나가 모두 까미유를 모델로 그린것이랍니다. 까미유가 18세이며,모네가 25세에 만난 연인들이죠.

'풀밭위의 점심식사'라는 그림은 같은 구도의 다른 작품도 있지요.위의 것은 앞에 습작Etude pour le Dejeuner Sur l'herbe이라고 되어있고 모스코바 푸시킨 미술관에 소장된 것이며,파리 오르세 뮤제에 있는 작품은 아래 사진 오른쪽 프레임 속의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도 의상도 약간은 다르지만, 아무튼 연관이 있는 두 그림이지요?

이럴 땐 미술평론가이며 저작가이신 김광우 님의 설명이 필요한데 말이죠.^^

화가들은 그림을 각각 그려서 그 조각들을 퍼즐 맞추듯 다시 한 화폭에 옮겨 그린다고 합니다.

뮤제 오르세에는 오른쪽 그림이 전시되어있습니다. 그 둘을 합쳐서 저 위의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을까요? 그럴 것 같아요. 그렇게들 작업을 하니까요.

 

 

모네 그림 중에서 정물화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작품 제목은 메모하지 못했네욤~ㅠㅠ

 

Chrysanthemes Rouges 1881 붉은 국화

 

Fleurs et Furits 1869 꽃과 과일

 

반갑지요? 이런 정물화가 있다는 것이... 당연한 일일텐데도 나는 반가웠어요.ㅎㅎ

 

Portrait de Madame Gaudibert 1868  마담 고디베르의 초상화

 

실물크기의 대형 그림으로 내 마음에 꽉 차는 그림이었다우. 216*138cm의 크기이니, 짐작이 가시죠? 마담의 의상에서 흐르는 실크빛 질감이

생생히 느껴지며, 마담이 두른 숄의 색채가 실재같이 아름답게 표현되었고, 양탄자의 꽃들과 은은히 흐르는 빛의 윤기가 참으로 화사해서 한참을 보던 작품이에요. 이 마담께서 가난에 휘둘리는 모네를 도와 에뜨르타에서 평온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웬수야~하하핫

 

                     La Japonaise,1876  232*142cm

 

일본에 심취해 있던 모네는 까미유를 모델로 한 일본여인을 그렸네요. 지베르니 모네의 집에도 일본 판화와 그림들이 전시되어있습니다.

위 그림은 대형작이라서 바라보노라면, 화려한 색채와 강렬한 분위기,그리고 까미유의 미소에 압도됩니다.

프랑스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일본과 사랑에 빠져 있지요. 일본의 모든 것들을 무척 좋아해요. 일본은 매력있는 나라입니다. 내게도...ㅎㅎ

 

.Camille Monet  sur son lit de mort 1879.  임종무렵의 까미유 모네

 

2층에서의 감상은 매우 인상적인 작품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마감을 합니다

이 작품은 내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답니다. 사연도 특별해요.1865년에 화가와 모델로 만난 연인들은 사랑했지만 금전적 어려움도 겪고 병마와도 싸우게 됩니다.함께 살기시작하고 2년 후에 아들 장을 낳지요.

모네는 1875년에 '양산을 든 여인'을 그립니다.까미유는 양산을 들고 서 있고, 뒷편에는 장이 자기들을 그리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지요. 색채도 화사하고 행복한 그림으로 보여집니다. 이작품은 워싱턴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답니다. 유명한 작품이니 사진이 없어도...ㅋㅋ

 

까미유는 1876년 자궁암이 발병합니다. 다음해에는 둘째 아들도 낳게 되지만, 어려운 생활속에서 병은 악화됩니다.

1879년 9월 5일. 까미유는 32세로 사랑하는 모네와의 14년 간의 생활을 뒤로하고 죽음에 이릅니다.

 

 

까미유가 죽은 후에 '양산을 든 여인'을 또 그리게 되는데, 그 때의 양산을 든 여인은 스산하기 그지없게 보입니다. 물론 뒷편에 Jean도 없고요.화집에서 찍어서 옮겨온 위 그림 보세요. 혼자 서 있는 바람속의 여인 같은 '양산을 든 여인'은 정말 쓸쓸해요. 얼굴도 잘 보이질 않고....

까미유의 얼굴모습을 확실히 그릴 수 없을 만큼 상심해서 일까요? 아니면 기억이 아슴아슴해서 일까요? 그러나 어찌되었든 모네는 죽은 까미유를 그렇게 사랑합니다. 자기 방식대로의 사랑법이겠지요. 1886년에 그린 이그림은 뮤제 오르세에 있습니다.

 

 

모네가 죽어가고 있는 까미유를 그린 것을 보고 사람들은 비난을 했답니다. 모네 사후 2년 뒤, 1928년 클레망소는 모네의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한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있었고, 이제 그 죽음이 찾아왔다.그 순간 나는 너무 놀랐다.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이제 영원히 우리곁을 떠나려는 사람의 마지막 이미지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그 특징을 잡아내야 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내 깊숙한 본능은 색채의 충격에 반응하고 있었다."

 

화가는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 앞에서도 화가적 본능에 충실할 수 있을 만큼 냉철하고 냉정한 것일까요?

그 후 모네는 1881년에 Alice라는 애들이 주렁주렁 달린 여인을 만나 다시 결혼생활을 합니다. 모네와 알리스의 가계도가 마르모탕에 있어요.

모네의 아들 장과 알리스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됐더라는 이야기는 마르모탕에 갔던 이야기에 잠시 올렸었지요?

예나 지금이나 조강지처 따로 있고, 호*강*지*처(은비메메 신조어^^) 따로 있나 봐요. 호호홋

 

이제 1층으로 내려갑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벽에는 천에 프린트된 대형 사진이 있습니다. 전시장 분위기가 이런 사진들로 인해 Up되지요.ㅎㅎ

 

 

1층에는 지베르니에서 그린 그림들과, 루앙성당을 그린 연작들, 그리고 지베르니에서 짚가리를 시리즈로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르누아르와 함께 여행을 갔던 지중해에서 그린 작품과 베니스의 여행에서 그린 작품들이 전시되었더군요.

위 사진은 루앙성당을 아침, 점심, 저녁의 일광에 따라 빛의 변화와 흐름을 그려낸 연작이지요. 1892-1894 기간에 그린 작품들.

 

Waterloo Bridge 1903 

 

모네가 영국에 가 있을 때 그린 워털루 브릿지 연작중 처음에 걸린 작품. 그러나 워털루 다리가 보이지 않죠? 그러나 잘 보세요.있죠?^^

다른 그림들에는 다리가 잘보여요. 이 그림은 일출이란 제목을 붙이고 싶어져요.ㅋㅋ 내 메모가 잘못 되어진 것처럼 어리둥절해 지네요.

 

Impression, soleil levant 1872 48*63cm

 

인상, 해돋이 그림은 요거예요.ㅎㅎ 화집에서 옮겨 왔어요. 인터넷 바다에서 건져온 것은 지워져 버리네욤~ㅠㅠ

 

Effet de vent, serie des peupliers 1891

 

모네의 시리즈 중에는 포플러를 그린 시리즈도 있어요. 구도는 같고 색채와 빛의 흐름이 다른 서너 작품이 전시되어있습니다.

 

                          Saule pleureur 1920-1922                                        사진은 화집에 수록된 것을 찍어 올린 거예요.

 

또한 강한 색채를 사용하고 어둑하게 그려진 수양버들Saule pleureur 시리즈도 서너 점 있었지요.ㅋㅋ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 가면 버드나무 시리즈 작품이 몇 점 있는데, 그 중에 조각배를 띄워둔 수양버드나무 그림을 큰딸이 제일 좋아합니다.

 

모네!!하면 수련이 단박 머리 속을 휘돌지요? 수련과 연꽃을 그린 작품 시리즈는 긴긴~시리즈죠? 모네는 시리즈도 잘 엮네요.ㅎㅎ

루브르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면 대형 수련 그림이 벽 하나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Autoportrait 1917년 경.

 

77세 때의 자신을 그렸습니다. 사진에서도 풍성하고 부드러운 흰수염이 매우 멋지고 인상적인데, 역시  자신도 수염을 사랑했나 봐요.ㅎㅎ

모네는 1926년 12월 5일, 86세에 까미유와 알리스 곁으로 갑니다. 알리스도 1911년에 죽었거든요.

인생은 이렇게 가고 오고....그런답니다.

 

나는 이렇게,

160 여점에 달하는 모네의 그림을 모두 감상하고 전시장을 나왔습니다. 사람 숲에 싸여 고개를 디밀며 열심히 봤다우.ㅋㅋ

세 시간 동안 열공했습니다. 김광우 님의 그림읽기 블방에 드나들며 공부하면서 보니까 더욱 마음에 와 닿았어요.^&^ 감쏴~~

 

 

2층에는 카페도 있고, 아래층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습니다. 은비에게 줄 모네 화집을 하나 장만하고 그림엽서를 골라들고 밖으로 나왔지요.

 

 

분수가 있는 광장에는 어둠이 짙게 내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시회장이 11시에 문을 닫는다니

아마도 여덟시나 여덟시 반까지는 입장이 가능한가 봅니다. 춥고 어두운 밤까지 줄 서서 기다리는 문화인들은 대체 누굴까요? ㅋㅋㅋ

 

 

카르멘 서곡을 연주하던 거리의 음악가도 집으로 갔는지 잠잠합니다. 불밝힌 그랑빨레 전시장의 입구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 있어야 하는

줄 선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도 불빛 휘황한 샹젤리제 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모네~ 그는 오래전에 떠났어도 평생을 함께 했던 그림을 남겨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깁니다그려.

그가 남긴 예술이란 것으로 인해 이렇게 우린 또 행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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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1.14~1926.12.5]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인상·일출(日出)》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생겼다. 햇빛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 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파리 출생. 소년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화가 부댕을 만나, 외광(外光)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2년간 병역을 치르고 1862년 파리로 귀환, 글레르 밑에서 A.르누아르, A.시슬레, F.바지유 등과 사귀며 공부하였다. 초기에는 G.쿠르베와 E.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 이때 J.터너, J.컨스터블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에 접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1872년 귀국,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양식을 개척하였다. 1874년 파리에서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12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출품된 작품 《인상·일출(日出)》이란 작품 제명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이후 18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한편 1878년에는 센강변의 베퇴유, 1883년에는 지베르니로 주거를 옮겨 작품을 제작하였고, 만년에는 저택 내 넓은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그리는 데 몰두하였다. 작품은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倂置)'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作畵)의도는 《루앙대성당》 《수련(睡蓮)》 등에서 보듯이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밖에 《소풍 The Picnic》 《강 The River》 등의 작품도 유명하며 만년에는 눈병을 앓았다. 1926년 폐암으로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인상주의미술 [印象主義美術, Impressionism art]

19세기 후반, 주로 1860∼189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상의 주의.

인상주의미술을 추진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 일파가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었다. 당시 급속하게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종래의 화가들이 나타낸 것처럼 그렇게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극히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비쳤다. 빛의 변화에 따라 같은 풍경이라도 전혀 양상을 달리하고 그 속에 포함된 대기의 뉘앙스의 미묘함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와 같이 빛의 문제, 밝음의 추구에서 색채의 문제에 이른 그들은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의 파악을 위하여 여러 가지 표현상의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 제작 태도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직관(直觀)을 중시하고,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의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에 전념하게 되었다.

인상주의가 미술상 또는 사상에 있어서 근대적 감성의 해방운동이고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 옮아가는 중요한 교량이라든가, 서유럽 사실주의미술의 최종단계이자 극치인 동시에 20세기 예술을 향한 기점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상의 인상파가 성립된 것은 1860년의 파리에서였다. 종래의 아카데믹한 작풍에 불만을 느낀 몇몇의 개성적인 청년작가들이 모여 하나의 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이미 1857년경부터 피사로, 세잔, 기요맹이 차례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제작하였고, 같은 무렵 바질·모네·르누아르·시슬레 등도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서로 우정을 맺었다. 이 중 모네는 '아카데미 스위스'에도 출입하여 이들 7명의 화가들은 곧 지기(知己)가 되어 매주 목요일에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새로운 회화에 관해 열심히 토론하였다. 이곳에는 그들 외에 새로운 예술의 옹호자 졸라와 그 밖에 시인·평론가들도 모였다. 그들은 1863년 낙선화전에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으로 혹평을 사고, 1865년 살롱에 출품한 《올랭피아》로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혁신화가 마네를 그들의 수령으로 받들고 밝고 대담한 새로운 회화관으로 해서 크게 계발(啓發)되었다.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이 카페 게르부아의 모임을 자연 해산시켰으나, 모네·피사로·시슬레 등이 전쟁을 피하여 런던으로 가서 터너와 컨스터블 등 영국 근대 풍경화파의 외광표현(外光表現)을 접한 사실은 벨라스케스·고야·들라크루아 등, 인상파적 기법을 선구적으로 이미 실천하여 그들에게 영향을 준 작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운동의 개화(開花)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전후(戰後)에 각각 파리로 돌아와, 1874년 봄 나달의 사진관에서 이 파의 첫 전람회인 '화가·조각가·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 제1회전을 열었다.

이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 《인상·일출(日出)》이라는 풍경화의 제명(題名)을 따서 르루아라는 한 미술기자가 '인상파전람회'라고 하는 다분히 조롱 섞인 기사를 《샤리바리》에 실은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이 그룹전은 세상의 몰이해와 싸우면서 1886년까지 전후 8회에 걸쳐 열렸는데, 1877년의 제3회전부터는 그들 자신도 '인상파'라는 명칭을 사용할 만큼 이 명칭은 일반화되었다.

이 인상파 그룹과 8회에 걸친 그들 전람회의 경과는 물론 일률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격인 마네는 처음부터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룹의 유력한 작가들이 전람회에 참가한 횟수를 보아도 8회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품한 사람은 피사로 단 한 사람뿐, 그 밖의 드가와 모리조는 7회, 기요맹이 6회, 모네와 고갱이 5회, 시슬레와 르누아르가 4회, 세잔은 2회에 불과했다. 쇠라·시냐크·르동 등은 겨우 마지막 전람회에 등장했을 뿐이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소수 화가의 12년에 걸친 악전고투의 인상파운동이 그다지 통일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평(世評)이 호전된 그 시점에서 이전부터 다소 난맥상을 보여왔던 그들의 공통적 사고와 그룹으로서의 결속은 무너져, 제8회전의 성공 후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인상파화가들은 재능과 기질면이 서로 다르듯이, 화풍에 있어서도 결코 한결같지 않았다. 모네·피사로·시슬레 등이 그 중에서도 인상파의 작풍을 가장 잘 나타낸 작가들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도 역시 시기에 따라 화풍이 변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인상파화가들이 유형적인 아카데미즘에 반항하고 어떤 관례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관찰과 기법으로 밝고 미묘한 대기(大氣)의 인상을 묘사하는 데 전념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빛의 효과를 교묘하게 나타낸 예로서 그들은 앞서 든 화가들 외에도 부댕이나 용킨트 등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법상의 특색에서도 얻는 바가 많았고, 선명한 색채감이나 유동적인 구도를 보여 주는 일본의 풍속화(우키요에)에서도 많은 계시를 받았다.

그들은 이른바 '외광파(外光派)'로서 언제나 옥외(屋外)에서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자연계의 모든 색은 빛과 대기에 의해 생겨나고 변화하므로 물체 고유의 색(고유색)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또한 사용하는 색채를 햇빛의 프리즘분해에 의해 얻을 수 있는 7색(色)에 한정하려 하였다. 그들은 팔레트에서 검정과 갈색을 추방하고 그늘부분에도 명도(明度)가 낮은 색채, 파랑이나 보라를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색조(色調)의 분할이라든가 색채의 병치(竝置)라고 하는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고안하였다. 빛의 광휘(光輝)를 될 수 있는 대로 강조하기 위해 팔레트에서 그림물감의 혼색을 피하고 순수색(純粹色)을 작고 짧게 칠하여 시신경(視神經)을 자극하도록 하는 한편, 서로 다른 순수색(특히 補色관계에 있는 색끼리)을 세밀하게 병치시켜 색채의 선명함을 한층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서로 인접하는 색들이 보는 사람의 망막 위에서 혼연히 융합되고(시각혼합작용), 게다가 그 융합된 색조는 팔레트 위에서의 명도가 떨어지는 혼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선명함을 간직하기 때문이었다. 신인상파(新印象派)는 인상파화가들이 경험 속에서 발견한 이 색채원리를 더욱 철저화한 데서 출발하였다.  ***네이버에서 검색된 자료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