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내가 미에르자를 만난 이듬 해에
그가 나를 위해 정성스레 옮겨 쓴 시 한편을
내게 건네 주었다.
나는 그 시를 읽고 앨범속에
소중히 끼워 두었다.
방문
홍 윤 숙
먼 후일......내가
유리병의 물처럼 맑아질 때
눈부신 소복으로
찾아 가리다.
문은
조금만
열어 놓아 주십시오.
잘 아는 노래의
첫 구절처럼
가벼운 망설임의
문을 밀면
당신은 그때 어디쯤에서
환-희 눈 시린
은백의 머리를
들어 주실까......
알듯 모를듯
아슴한 눈길
비가 서리고
난로엔
곱게 세월 묻은
주전자 하나
숭숭 물이 끓게 하십시오.
손수 차 한잔
따라 주시고
가만한 웃음
흘려 주십시오.
창 밖엔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그런 날 오후에
찾아 가리다.
********
이 시를 간직하며,
우리 서로 세월이 흘러 백발이 되는 날
서로에게 찾아 가서, 이 싯구절을 읊조리며
곱게 세월 묻은 주전자에서 차 한잔을 따르고,
떠나 보낸 세월 얘기하며
남은 세월의 흰 머리카락들을
함께 세며 살자던,
미에르자와 나의 약속.
이십 오 륙년이 지난 지금
내 머리엔 어느새 백발이 늘어 가는데
우리의 약속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었다.
미에르자가 먼저 자기의 별로 떠났기 때문에...
그는
이 약속만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다.
94년도 여름방학 어느날
우리는 동유럽 여행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여권을 발급 받아야 한다면서, 준비를 하겠노라고 했다.
그 여름이 다 지나도록
아무런 말도 없더니...
이제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우리끼리 여행을 떠났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내따님들과
보쿰에서 우릴 기다리는 노성씨와 함께...
영원히 지켜지지 못한 약속은
그렇게 세월속에 묻혀 갔지만
내 맘속엔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고 싶은 간절함이
날마다 애처롭다.
미에르자와 함께하지 못한 그 해 여름의 동유럽.... 프라하의 황금소로.
노성씨는 나와 우리 두 따님의 보호자 겸 안내자가 되어
행복한 유럽 기차여행을 하게 해 주었다.
그 또한 지난 달, 독일로 다시 떠났다.
그래서 나는, 또 한사람의 내 보호자를 멀리 두게 되었다. 모두 멀리멀리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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