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07

베싸메무쵸를 부르던 남자

eunbee~ 2008. 1. 5. 12:40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는 기간 중  가장 긴 시간을 머무르며 가장 많은 것을 본 곳이 페루였다.

어느 도시에서는 한나절을 보고 다시 돌아서야 되기도 했으며, 길어야 이틀을 묵을 수 있었다.

바쁜 여행 스케줄에 쫓기며  정신없이, 보았는가 하면 돌아서고, 만났는가 하면 헤어져야  했다.

 

그렇게 빡빡한 스케줄의 여행 중 어느날, 리마에 도착했다.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시각에,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현지 안내자는 대기하고 있던 버스로

우리를 안내했다. 순박한 표정에 순박한 옷차림으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인사한다.

그의 말소리는 그의 인상에서 풍겨오는 순박함 보다 훨씬 더 많이 순박했다.

 

"안녕하세요?  먼길 오시느라 수고들 하셨어요.  피곤하시지요?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기까지는 그 어느 안내인과의 만남에서나 대동소이한 상투적인 인사말이었다.

"저는요. 1984년이래 변함없이 이 모습으로 남미땅에서 살고 있는 000 입니다.

제가 남미에 와서 처음엔 파라과이땅에서 수퍼맨으로 3년을 살았지요.

그리고 상파울로에서 2년을 살았구요.

아르헨티나에서 또 얼마간을 살았습니다.

그게 모두 다 우리 아버지의 역마살 낀 팔자 때문이지요.

그 후에 우루과이에서  얼마간을 살다가 상파울로로 다시 왔지요.

처음에 에스파니아어를 열심히 공부했더니, 다시 포르투갈어를 배워야 했었고

다시 포르투갈어에 익숙해질만 하니까, 또 스페인어/에스파냐어/ 권으로 이사 해야만 했지요.

이제는 이곳에서 자리잡고 오래 잘 살려나보다 했는데,

상파울로에서 자리잡고 살던 아버지가 또다시 심심했던지

'우리 어디로 갈까?  멕시코로 갈까.. 페루로 갈까?' 하시기에,  제가 그냥  "페루로 갑시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이렇게 페루로 와서 살게 되었답니다. 94년도 부터 이 곳에 안착 했어요."

하하하하~~

담담하게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뒷자리에 앉은 우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소리 죽여 웃느라 진땀을 뺐다.

 

그의 인생 역정 만리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날 아버지께서 '작은애 집에 다녀 오마.' 하고 가셨어요. 내 동생이 아르헨티나에 살거든요.

그렇게 가시더니 아주 안오시데요.  4년 전 아버지는 그렇게 가셨습니다.

저는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위조 문서 작성 공급자로도 일해 봤구요.

도둑 시장에서 장물아비도 했어요. 남미 시장에선 이 곳 도둑 시장이 아주 유명하지요.

권총도 한자루 사 가지고, 신변 보호를 위해 지니고 다녔습니다.

리마 도둑 시장에선 제가 제법 알려진 인물입니다. 먼 다른 남미국가에서도 저를 찾아 온다니깐요."

믿거나 말거나, 술술 담담하게 얘기도 잘한다.

가끔 웃는 순박한 너털 웃음은 그가 들려 주는 이야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다.

 

역마살 낀 아버지에게 고분고분 순종하며, 여러나라를 떠돌며 적응하고 살아야만 했던 지난한 세월을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로 담담하게 얘기를 할까 싶으면서도, 그 속에 베어있는

어쩔 수 없는 체념과 순종이 그 사람의 지금의 모습으로 굳어 가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남자 나이 오십 쯤 되었으니, 자기의 세계가 모습에 베어있을 세월이다.

그의 말대로, 1984년 이래, 쭈욱 그런 모습으로 살았다니,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쨌거나, 처음 만나자 마자 통성명을 마치고는  자기의 이주경력을 한없이 주워 섬기니

뒷자리에 앉은 우리 몇명은 배꼽 빠지게 웃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슬픈 인생 역정이구먼, 왜 그리도 웃음이 터졌을까.

그의 꾸밈없는 말씨와, 들려주는 얘기 내용과는 걸맞지 않는 무표정한 모습 때문이었나?

 

그렇게 만난 그가, 시간이 지날 수록 정겹고, 옆집아저씨 같이 부담스럽지 않더니, 헤어질 때는 아쉬운

정마져 느끼게 되었다. 별반 지식도 없는 것같아, 이 거창한 잉카문명을,

저 사람에게 맡겨도 될까 싶게 내심 걱정을 하던 우리 팀은,

나중에는 한결같이 그 아저씨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실력이나 지식이 아니라, 따스한 인간미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싶은 정인가보다.

이렇게 저렇게 대강 철저히 설명하고.. 듣고....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너그럽고 유연하게, 누구 하나 까탈 부리지 않고,

설렁설렁 넘어가는 그의 스타일에 맞춰 즐겁게  즐겁게  엿새를 지냈다.

 

헤어지는 날, 공항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그가 뜬금없이 노랠 불러 주겠단다.

우와~ 우리는 또다시 무척 반가운냥  무척 기대된다는 듯, 손뼉치며 좋아라했다.

아니, 즐겁기도 하고, 난데없는 서비스?에 고맙다는 생각을 모두다 했으리라.

'베싸메~~ 베싸메 무~쵸~~'

잘 나가더니, 음정 불안, 음 이탈 현상, 불안 불안.. 노래가 이상한 곳으로 달린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잘 부르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이 더욱 웃긴다.

 

웃음속에 숨어 있는 눈물.

난 그것을 알아차렸다.

내 콧잔등이 갑자기 시큰해졌다.

남이 눈치 챌까봐 벙거지 모자를 더 깊이 꾹 눌러 썼다.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니, 그도 모자를 눌러 쓴다.

 

이렇게 우리는 만났고, 또 헤어졌다.

내게 여행이란 새로운 문물을 보고 느끼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예기치 못했던 만남이

훨씬더 가슴에 오래 남고, 그 감동이 크다.

 

오늘도 조국땅에서 찾아간 여행 손님을 맞으며 '저는요, 1984년이래---'하면서 인사말 나누고 있을

그를 생각해 본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보내야 했던 고난의 시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붙이에게

들려 주듯 얘기하며, 살가운 정을 느끼게 하는 순박하게 생긴 아저씨.

종가집 종손이라고 얘기하고 또 얘기하던 그분이,

부자가 되어 더욱더 넉넉한 웃음을 웃었으면 좋겠다.

 

 

이 사진속에 그 아저씨가 있네.

원주민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라고, 우리를 그들 집으로 안내했던, 따스한 맘을 가진 우리네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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