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정끝별님을 이계절에 읽자하니...

eunbee~ 2019. 12. 9. 17:47

 사진 모두, 2019. 12. 9. 15 : 35 분 즈음



 '불명산 벼랑에 피어 있는 한 화암'


 

(...........)


우화雨花,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라니, 멋지지 않습니까?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득도하신 후 법화경을 처음 설법하셨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배경 설화를 지닌 말이라지요.

해서 '우화'라는 현판은 높은 경지의 고승들이 기거하는 곳에만

달 수 있었답니다. 굳이 고승대덕이나 설법까지 가지 않더라도

밖으로는 불명산佛明山 자락이, 안으로는 조붓한 마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우화루에 앉아 있노라면 보이는 게 모두 '우화' 아닌 게

없을 것만 같습니다. 철따라 지나가는 바람이, 눈이, 비가, 는개가, 꽃잎이,

낙엽이 모두 꽃처럼 보일 것만 같은 미학적인 공간입니다. 그것들이

마당에 들이닥치기라도 할 적이면 또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 더없이

기능적인 공간이 되기도 했겠지요. 우화루 들보에는 낡디낡은 목어木魚

한 마리가, 고사 때 쓰고 깜빡 잊은 북어처럼 일없다는 듯 걸려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매달려 있었던지 목어의 눈이 유난히 튀어나와 있습니다.


 

(............)


 

이제 누렁이는 우화와 극락, 철영綴英과 적묵寂默에 싸인 마당 한가운데

상팔자로 누워버렸습니다. 적묵당 툇마루에 앉아, 사지를 늘어뜨린

누렁이를 보고 있자니 저도 덩달아 사르르 사지가 풀리는 듯합니다.

에라, 모르겠다, 자빠져서 보자니, 정연하면서도 창연한 처마들이

각을 이루며 꼭 마당만 한 하늘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게 적막하게,

그렇게 아늑하게, 고여있는 하늘과 흐르는 하늘이 서로를 마주보며

누렁이 한 마리를 잘 '늙히우고'있습니다.

화암사花巖寺는 잇고, 덧대고, 늘리고, 겹친 경계 안에서 부처와 인간이,

자연과 삶이 오밀조밀 다정하게 거하고 있었습니다. 깊고 가파른

곳에서 소박하게 잘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래면서 삭아가는

세월의 결처럼 고색창연하게요.

 

(............)

 

 




 

<화암사 깨끗한 개 두 마리> / 안도현

 

화암사 안마당에는

스님 모시고 노는 개 두 마리가 있습니다

그 귀가 하도 맑고 깨끗해서

뒷산 다람쥐 도토리 굴리는 소리까지

훤히 다 듣습니다

간혹 귀 쫑긋 세우고 쌩 하니 달려갔다가는

소득 없이 터덜터덜 돌아올 때가 있는데

귓전에 닿는 소리에

덕지덕지 욕심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냥 한번 그래 본 것입니다

바람이, 일없이 풍경소리를 내는 물고기 꼬리를

그저 그냥 한번 툭 치고 가듯이

 

 - 곁들여진 시 -






***




 

정끝별님의 여행산문집을 읽습니다.

이 계절에 읽기엔 좋은 글이네요.


봄날에서 시작되어 겨울풍경으로 끝맺는 이 에세이들은

모두 14꼭지인데, 이곳에 일부를 올린 글은 그 11번째입니다.


'불명산 벼랑에 피어 있는 한 화암'의 화암사

전주 인근의 숨은 절집이라지요.

 

<그리운 건 언제나 문득 온다>

정끝별, 여행산문집


'벼랑에 핀 한 꽃'같은 이 절집 이야기만이 아니라,

정끝별님의 자분자분 부려놓은 글줄을

힘빼고 술렁술렁 읽다보면

어느새 사라진, 사라져가는것들이 가져오는

애잔한 그리움에 젖습니다.

 

창밖 나뭇잎 다 떨군 앙상한 나무들을 내다보며 앉아

이 책을 읽자니 까닭모를 설움이 배어듭니다.

그래서 그냥 한번 눈물 그렁이다가,

그냥 생각나는대로 대강 옮겨 담습니다.

 

조용한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서....


충동적인 포스팅은 늘 실패작이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나누어 읽고 싶은 마음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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