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가을 詩 - 염명순

eunbee~ 2014. 9. 23. 19:24



시인 염명순님이 수학하던 피레네산맥 가까운 뚤루즈 부근의 들녁. 

지난 8월 끄트머리 어느날 안개낀 아침




가을


                                 염 명 순



    들꽃이 가득 핀 가을 들판에서 개양귀비와 수레국화를 

꺾었다. 어느 기교파 시인의 말대로 가을은 트럼펫 소리로 

빈 들을 덮어오고 바람이 많은 뚤루즈의 가을 내내 밤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초현실주의 유령들이 창 밖을 서성

이다 갔다. 뜨거웠던 여름의 흔적을 그리다 사라진 젊은 화

가에게서 불현듯 전사통지서가 날아오고 오늘도 요절하기 

위해 태어나는 짧은 햇살이여, 변방엔 흰 들국화만 무성하

여 짧았지만 찬란한 그대 아름다움을 애도하는가. 나 또한 

관통하는 저 햇살의 총알을 피하지 못했으니 몸을 여읜 마

음은 가을 들판에서 소복을 입는다.







                       염 명 순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이고 나면

어김없이 아프다

아버지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오셨어요

아버지의 쓸쓸한 생애는

부산 근교 함경남도 단천 동산에 묻히셨어요

얘야, 고향도 떠나왔는데 어딘들 못 가겠느냐


꿈을 불어로 꾼 날은 슬프다

다시는 시를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 꿈의 머리맡에서 누가

이마를 짚어주는 듯했는데

밥 많이 먹으라는 언니의

안부전화가 걸려왔다





***


어제는 파리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시인을 만났다. 

수수하나 고상한 옷차림에 수줍은 미소, 등에는 어울리지 않는 배낭이 

저또한 수줍게 달랑거리고, 손에 든 채소 한다발도 부끄러워 

살짝 고개돌린 시장가방 속에서 베시시. 

'미용실에 들렀다가 중국시장을 다녀와요'

13구 중국시장 장보기의 찬꺼리들이 애처로웠다. 


난 왜 그 시인을 보면 늘 아지못할 슬픈안개가 여울져 찰랑일까. 

나 조차 알 수 없는 일.

겸손한 웃음, 보드라운 말씨, 정많은 눈빛... 내가 시인을 사랑하나 보다.

시인과 내 딸들의 이방인 처지가 안타까운가 보다.


또한 내 딸들의 손에 들린 찬거리나 에비앙 물병들의 축쳐지는 무게를 볼 때마다 

언제나 안쓰럽다.


이제 그들을 두고 

나는 다시 떠나야 하는 나그네새.

제 설움에 겨워 타인을 눈물짓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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