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더 닳아질 마음이 남아 있구나
갈 만큼 갔다고 생각했는데
못다 간 마음은 낡은 구두 속에서
거친 숨결을 고르고
내가 밟은 길들이 등뒤에서 나를 감아온다
내 발에 잘 맞는 구두일수록
나와의 은밀한 기억을 즐기고
내가 잠시 머물던 차양 낮은 골목골목에
머리를 맞대어 피던 채송화 봉숭아 같은 키 작은 꽃들
주머니마다 씨앗을 가득 채우며
다음해 봄날을 예감하고 있는지
벗어놓은 내 구두 속에서는
가끔 마른풀 냄새와 바람 소리가 났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내가 가면 비로소 길이 되던
그런 날들도 있었다
구두는 내 그림자 뒤에 발자국을 새기며
아파오던 발가락의 추억을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지
어느새 내 발 모양을 그대로 닮아 있고
텅 빈 구두를 보면 한없이 적막해지는 날에
우리는 길이 아닌 곳에서도 자주
개망초꽃처럼 하얗게 흔들리다 돌아오곤 했다
함께 닳아 초라해진
내 낡은 구두를 신고
나는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
사진 : 어제 밤늦도록 베르사유 정원을 헤매고
돌아오는 기차같은 메트로에서,
단한번도 다른 구두를 신지않은
지난 여섯 달동안 파리에서의 내 발자국을 돌아 보며...
내 구두에게 고마움을 담아 사랑의 눈맞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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