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빠리에 부친 편지 -피천득

eunbee~ 2013. 11. 23. 20:30

< 빠리에 부친 편지 >

 

         - 피천득 -

 

지난 토요일 오후, 오랜간만에 비원에 갔었습니다. 비를 *거어주던 느티나무 아래, 그 돌 위에 앉았었습니다.

카페 테라스에서 오래오래 차를 마시며 그랑 블바르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다보고 있기도 할 그대와 같이.

그러다가 나는 신록이 밝은 오월의 정원을 다시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걸어가다가는 발을 멈추고, 섰다가는 다시 걸었습니다.

 꽁꼬르드에서 에뜨왈르를 향하여 샹젤리제를 걷기도 할 그대와 같이,

그대가 말한 그 아름다운 종소리들이 울려옵니다. 개선문은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영원한 애인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대와 같은 외로운 나그네를 위하여 서 있습니다.

 지금 여기는 밤 열한 시, 그곳은 오후 세 시쯤 될 것입니다.

 이 순간에 그대는 화실 캔버스 앞에 앉아 계실 것입니다. 아니면 뛰율르리 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루브르 박물관에 계실 것입니다. 언젠가 내가 프린트로 보여 드린 세잔느의 정물화 '파란 화병'앞에

서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란 화병에 파란 참푸꽃, 그것들이 파란색 배경에 배치되어 있지마는, 마치 보색에 놓여 있는 것같이 또렷하게

도드라지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그는 세련된 '칼라리스트'입니다.

 

 

영화 '까미유 끌로델'에서..

 

 헤어지면 멀어진다는 그런 말은 거짓말입니다. 녹음이 짙어가듯 그리운 그대여, 주고 가신 화병에는 장미 두 송이가

무서운 빛깔로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염격한 거부로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나이를 잃은 영원한 소년입니다.

 한 주일이 그리 멀더니 일 년이 다가옵니다. 가실 때 그렇게 우거졌던 녹음 위에 단풍이 지고 지난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더니,

이제 라일락이 자리를 물러서며 신록이 짙어갑니다. 젊음 같은 신록이 나날이 원숙해집니다.

 둘이서 걸으면 걸을 만하다시던 서울 거리를 혼자서 걷기도 합니다. 빠리는 철이 늦다지요. 그래도 지금은 마로니에가 한창이겠습니다.

 걸음걸음 파아란 보라빛 그대의 치맛자락, 똑같은 구두를 신은 여인이나 같은 모자는 만날 수 없다는 빠리, 거기서도 당신의 의상은

한 이채일 것입니다. 빠리의 하늘은 변하기 쉽다지요. 여자의 마음 같다고. 그러나 구름이 비치는 것은 물의 표면이지 호수의 깊은 곳은 아닐 것입니다. 날이 흐리면 머리에 빗질 아니하실 것이 걱정되오나, 신록 같은 그 모습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

 

소년 같은 진솔한 마음과 꽃같이 순수한 감성과

성직자 같은 고결한 인품과 해탈자 같은 청결한 무욕無慾의 수필.

그리움을 넘어서 슬픔과 애닯음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피천득의 미문美文은 언제, 어느때 읽어도 동심의 고향이다.

 

피천득 수필집 [인연] 책날개에서...

 

(*거어주던 - 오타 아님. 나도 모름. 아마도 인쇄시 오자 혹은 낙자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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