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그로브숲

은비네는..

eunbee~ 2012. 11. 2. 14:12

 

 

시월 마지막 주말, 오후 4시의 햇살은 곱고 다정합니다.

인생의 황혼녘에 서 있는 우리네 가슴 속 온기도 그처럼 순하고 다정하지 않을까요.

숨넘치게 보채지도 않고 눈부시게 쏘아대지도 않아 오래도록 포근히 안겨있고 싶은 시월의 햇살.

햇볕 아래 눈 게슴츠레 뜨고 앉아있는 등허리가

간질간질거립니다.

 

 

북구의 여인들은 실재보다 아름다워 보인다죠.

비낀 햇살 속에서는 어렴풋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곁들여져 여인들의 하얀 얼굴을 더욱

입체적이고 아름답게 보여지게 한답니다.

그러나 우리네가 살고 있는 이땅에서도 가을날엔 모든 사물들은 아름답게 보여요.

북구의 어느나라가 아니라해도 모든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조도입니다.

 

 

가을 햇살이 내려앉은 숲에서는 이름모를 작은 새도 까마귀도 힘을 빼고 지저귀네요.

들녘은 풍성하고 햇살은 포근하니, 따순 가을날에는 세상 모는 것이 억센풀기를 빼버리는가 봅니다.

시퍼렇게 기운뻗치며 펄럭거리던 잎들이 모두 색을 바꾸고 바래어, 고운빛으로 나부끼는 것처럼 말이에요.

볕좋은 가을날 오후같이 항상 포근하고 순한 세월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은비는 만성절 바캉스라서 매일 집에서 뒤굴거리고 있답니다.

앵발리드 옆 단골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르자고 해도 못들은 척,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가자해도 못들은 척,

Sceaux공원에 나가서 산책하자해도 못들은 척,

막무가내로 집안에서만 뒤굴뒤굴거린다고 은비엄마가 한탄합니다.

한 주동안 바깥 출입이라고는 친구랑 스포츠클럽에 가서 농구를 하고 온 일 뿐이라지 뭐예요.

자기 아빠 닮아서 집구석 귀신이에요.ㅋㅋ

그러려면 자기 아빠의 독서취향까지 닮던지...ㅠ

 

 

은비네는 레스토랑을 매각처분했다우.

취향에 맞지않는 사업을 시작해서 무던히도 싫어하더니 드디어 적임자가 나타났다네요.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이 레스토랑 카운터에 앉아서 다른사람들 음식먹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사람이 그런일을 하더니...ㅋ

늘 직원들에게 맡겨두고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들여다 보는 것마져 그만두기로 하고 용감하게 처분해 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레스토랑 하나 개업을 할 때도 4개월 내지는 6개월이 걸리고, 처분할 때 역시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네요.

모든 것이 적법하고 명확하게 전개되고, 투명하고 합법적인 절차하에서 까다롭게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제도적구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기당할 일도, 망해버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사회예요.

9월말에 매매계약서에 도장찍었으나 12월이 되어야 모든 행정적인 절차가 마무리 된다니....

그동안 은비엄마는 심심하다고 이엄마에게 그곳에 와서 함께 뒹굴거리고 크리스마스도 보내고 하자는데.... 글쎄요.

나도 스케줄 여러갈래로 요리조리 바삐 꼬인 사람이라서리~ ㅎㅎ

 

 

은비이모는 다니던 회사에서 90%의 급여를 받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까다로운 시험과 자격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파리 10대학인지 몇대학인지에서 1년동안 공부를 한답니다.

9월학기가 시작되었으니, 새로운 생활에 요즘 신이 났습니다.

여러나라의 인재들이 모여서 다양한 친구랑 재밌는 공부를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인데, 학생들 분위기가 좋아 금상첨화 상황이라네요.

선진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살맛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소리들으면, 나는 내아들이 가여워져서 마음이 무척 아프지요.

공무원처럼 9 to 5도 아닌 직장에서 때때로 일요일까지 반납하면서, 그게 뭣하는 짓인지...원.

대한민국의 대기업들은 밤까지 직원들 혹사 시키면서 시간외 수당도 지급되지않는다고 하네요. 이런~ 우라*레이션같은 눔들 봤나~

 

 

은비가 대여섯 살 적 한국에 왔을 때, 차를 타고 지나다가 땡볕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봤어요.

"엄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더운데서 일을 해?"

"어릴 때 공부를 게을리해서 그래. 은비도 공부 게을리하고 실력없는 사람으로 크면 저렇게 땡볕에서 고생하며 일하고 먹고 살아야 해."

그 다음부터 은비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공부 못해서 그러는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은 이모처럼 사무실 안에서

시원하게 일하는 사람인줄 알아요. ㅎㅎㅎ 아마도 지금까지도 그럴걸요? 은비는 나이보다 너무너무 순진하고 세상살이에 맹~하다우.

 

 

공부는 하기싫고 일자리는 쾌적한 곳이길 바라는 은비는

공부하지 않아서 땡볕에서 일하게 되는 앞날의 일을 만회하느라 지금부터 밖엘 나가지 않는 걸까요? ㅋㅋ

아무리 좋은 일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좀처럼 나갈 줄 모르는 은비를 밖으로 끌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모도 이모부도 은비를 꼬여내느라 애를 쓰지만, 공원에 나가서 피크닉하는 일도 년중행사로 손꼽아야 하니....

 

 

만성절 방학이 끝나면 또 크리스마스 바캉스가 찾아와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프랑스는 툭하면 놀아요. 놀다가 판나는 학교예요.ㅎㅎㅎ

은비엄마는 바캉스가 걱정스럽다고 해요.

그동안엔 레스토랑이다 뭐다해서 은비를 온종일 케어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젠 하루종일 붙어앉아 하루 두 끼(그애는 자기 딸을 두 끼만 해 먹이나?) 해 먹이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라고

끌탕을 하는 이야기를 맨날 이메일에 주절주절 써놓는다우.

그애(내작은따님) 은비 친엄마 맞아요?

 

 

은비엄마도 가을 햇살처럼 순해지고 고와지고 나른해졌으면 어떨까요.

은비를 바라보고 보살피는 일이 가을햇살처럼 남은 온기를 모두 퍼부어 탱글탱글 열매맺게하고,

울긋불긋 아름답게 하고, 토실토실 살찌우게 하는 그런 착한 햇살로 자기딸을 보듬어 주기를 기도해 봅니다.

자기를 귀찮게 하지않는 사람에겐 더없이 따스하고 살갑고 매력적인 여인이, 자기를 귀찮게 하는 사람에겐 가시같으니

언제나 가을햇볕처럼 온세상을 두루 따스하게 할까요. 호호홍~

(이 포스팅은 우리 딸이 보면 안되는디? 뭐~ 본다해도 깔깔깔 웃고 말겠지만...그애는 자기를 너무 잘 아니까 ㅋㅋ

전혀 변명하거나 비굴해지지 않아요.ㅎ~)

 

 

 

그래서 은비는 열여덟 살 때를 벌써부터 대비하고 있어요. ㅎㅎㅎ~

방안에서만 대비해서 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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