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지그재그 포스팅 -베니스에서 죽다-

eunbee~ 2012. 8. 27. 17:02

 

구스타프 아셴바하, 그는 슐레지엔 지방의 안정적이고 엄격하고 검약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고위법관의 아들로 태어난다.

재능은 특이하거나 특별난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부하지도 않은,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한 작가다.

친구도 없고 그닥 건강하지도 못한 그는 '정말로 존경할 만한 예술가적 재능이란 인생의 모든 단계들로부터 그 나름대로

독특한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천복을 입어야 빛을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믿기에 순간순간 성실히 노력하며, 노년을 고대한다.

 

열심히 글을 쓰고 명성도 얻고, 사회적인 존경도 받는 인물이 되었다.

피곤한 삶을 살아왔고, 이제 초로에 접어든 아셴바하는

노년의 여유로움속에 잠길 수 있는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 여기까지는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안삼환 옮김-을 읽고 감상문을 적다가 그만 둔 것,

왠지 난 여기까지 쓰고 쓰기가 싫어졌다.**

 

 

타치오와 아센바흐

 

[베니스에서 죽다],

첫화면 가득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작되는, 풍경이 멋진 영화,

영화 내내 자주 흐르는 음악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이라던데..)이 좋던 영화,

기억을 더듬어 영화이야기를 대강 해보자.

 

웬만큼의 성공을 거둔 초로의 작곡가 아센바흐는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당도한 곳이 베니스,

그가 머물기 시작하고 얼마 후 베니스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모든 여행자들이 떠나지만 아센바흐는 떠나지 않는다.

 

아센바흐는 그곳에서 열네살의 미소년을 보게 되고, 그의 아름다움에 온 정신을 빼앗기게 된다.

바닷가 긴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타치오(소년)를 바라보며 한숨쉬기도하고 좁은 골목길에서 미행하기도 한다.

 

 

비요른 안드레센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Morte a Venezia, 1971] 타치오 역

'베르사유의 장미' '오스칼'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답니다. 그의 생애가 또 한편의 드라마더군요. 

 

꿈속에서 조차 찾아헤매던 타치오와는 말한마디 건내지 못하고,

타치오가 떠난 뒤 쓸쓸한 베니스 리도 앞바다 푸른물결 앞에서 아센바흐는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떨군다. 해변 뜨거운 태양아래서 힘없이.... 타치오의 환영?을 보며 그는 그렇게 죽어가고... 영화는 끝난다.

 

아센바흐가 미혹된 것은 열네살 미소년이 아니고,

그 소년이 지닌 절대미에 대한 예술가의 본능이 좇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타치오의 뒤를 밟으며 헤매는 아센바흐의 골목길에서의 헤매임은, 

인생도 예술도 이제 막 정점을 지나 내리막 앞에 선

한 인간의 어쩌지 못하는 마지막 갈망의 미로가 아닐까.

 

 

 

 

베니스의 우울하고 미묘한 풍경이 가져오는 몽환적인 영상은 오래도록 기억속에서 아물거리고 있다.

오래오래 기억되는 영화 속 베니스 풍경이다.

 

아센바흐가 묵은 리도 섬은, 두 딸들과 내가 찾았을 때는 영화 속 풍경과는 너무도 달랐다.

여름이었는데도 온 섬은 물론 바닷가도 한적했고, 미숫가루처럼 보드랍고 고운 모래는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내 캠코더 렌즈에 달라붙어서 애를 먹였다.

리도섬은 베니스 영화제가 개최되지않으면 이렇게 한적한 섬인가 보다,고 우린 이야기 했었다.

아센바흐가 죽을만큼 쓸쓸하군, 하면서....

 

책을 읽고서 감상을 써보자 마음 내보다가 포기한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는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 오래전에 본 영화는 기억도 가물거리고...

 

내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에 곁들여진 다른 것이 숨어있지.ㅋㅋ

 

 

 

 

아센바흐의 '미소년'과

eunbee의 '미소년'을 소개하고 싶어서...하핫

 

아센바흐는 베니스 여행에서 미소년을 만났고, 한마디 말도 건내지 못했지만,

eunbee는 파리 시청앞 인파 속에서 '미소년'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블로그 주소를 건내고

그소년의 아름다운 미소와 목소리와 수줍은 표정이 주는 사랑스러움을 한동안 곁에서 느꼈다.

그러나 eunbee의 미소년은 아센바흐의 타치오가 절대 될 수 없다.

그 까닭은 eunbee의 마음이 전혀 절절하지 않기에...ㅋㅋㅋ

인파속에서 한순간 발견한 '미소가 아름다운 청년'이었을 뿐.

그러고보니 억지춘향 대입이었네. 이런~~~ㅠ

 

 

eunbee의 미소년 ^^

 

그러나, 실은...이 이야기를 정녕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이것은 덤.

 

진짜 이야기는 또 있다.

바로 열여섯의 배우가 세월이 흐르니 이런 얼굴이 되더라는 이야기!! 하하핫.

 

세월은 모든것을 변하게 한다. 제행무상!!!

 

 

50대의 비요른 안드레센Bjorn Andresen

 

우리 모두에게도 아센바흐가 미혹迷惑던 타치오의 세월이 있었고,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타치오도 이렇게 변한다.

현재의, 현상의, 보여지는 것,에 너무 자만하거나 상심하거나 잠겨들지 말지어다. 하하핫

 

각설하고,^*^

 

 

 

자~이제, 진짜 품격있는 영화감상문을 읽어볼 차례~ ㅋㅋ

 

유종호 교수님

 

문학평론가 유종호 님이 쓴 '추억속 내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

 

1970년대 초 버팔로 시절에 독일 영화 '토니오 크뢰거'를 본 적이 있다. 토마스 만의 걸작 단편을 영화화한 것인데 원작에 아주 충실한 점이 놀라웠다. 소설의 영화화는 원작과의 괴리를 빚어내게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일편단심 원작에 충실했다. 다시 볼 기회가 없었으니 혹 잘못 파악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단편에 끌려 서너 번 읽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원작 충실성의 인지가 크게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가 동급생 한스 한젠과 함께 하교하는 첫 장면에서 대화 내용에 이르기까지 줄거리 진행도 작품과 똑같았다.

그 후 거의 20년 만에 색채영화로 토마스 만 원작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이 영화는 원작의 줄거리에 충실하면서도 대담한 삽화 도입이 특색이어서 '토니오 크뢰거'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뮌헨 거주의 쉰 살 난 작가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는 과로 끝의 피로로 여행에 나선다. 첫 체재지에서 잠시 머무른 후 그는 베니스로 향해 리도의 호텔에 머문다.

호텔에는 폴란드 귀족 가족이 있었고, 열네 살쯤 돼 보이는 막내 타치오는 빼어난 미소년이다. 소년이 구현하고 있는 완벽한 미에 매혹된 그의 탄복은 점차 격정으로 변해간다. 아셴바흐가 자기의 사랑을 비밀로 하고 있듯이 베니스는 콜레라가 번지고 있음을 비밀에 부치고 있다. 아셴바흐는 콜레라의 창궐을 확인하지만 미소년 가족에게 알려주고 스스로 베니스를 떠나는 대신 자기 격정에 몸을 맡긴다. 베니스의 거리로 혹은 성당으로 미소년의 뒤를 따르며 바라보는 것이 그의 낙이다. 도덕적 의지가 망가지고 정신도 혼란해진 그는 바닷가에서 숨을 거둔다. 파란 수평선을 배경으로 물속에 서 있는 타치오가 자기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 같은 느낌을 그는 받는다.

큰 줄기에 관한 한 영화는 원작에 충실한 편이다. 면허 없는 곤돌라 사공과의 사단, 베니스를 떠나려다 잘못 탁송된 수하물로 인한 체재 연기, 소독과 관련된 의문에 대해 상례적인 요식 행위라는 호텔 측의 답변, 영국인 여행사 직원에게 들은 콜레라 만연 사실, 4인조 길거리 악사의 연주, 이발소에서의 화장 등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셴바흐는 작가가 아니라 작곡과 지휘를 겸한 교수로 되어 있다. 구스타프 말러를 모델로 했다는 것인데 말러 교향곡이 배경 음악으로 나오고 있다. 알프레트라는 분신(alter egp)과의 대화나 토론, '엘리제를 위하여' 연주 장면에서의 타치오나 창녀의 등장, 아내와의 추억 등 상상 장면은 비스콘티의 해석이요 창작이다.

사변적이고 내성적인 작품의 영화화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예감한다. 배우의 내면성 표출 능력, 미소년의 적정한 영상 포착, 정교한 화면의 구성으로 일급의 영화로 만들어낸 감독의 능력은 탁월하다. 가령 천박한 거리 악사들의 연주에 대해서 냉담한 채 귀족적 기품을 보여주는 타치오의 표정, 일정 거리를 두고 소년의 뒤를 밟는 베니스 골목길에서의 아셴바흐의 고통스러운 노력,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타치오와 원경의 선박과 카메라 삼각대의 조합 등은 쉬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예술이 모든 교육의 원천이며 예술가는 모범적이어야 하고 예술이 모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변 자기 생각에 회의를 갖고 있는 아셴바흐는 음악이 예술 중 가장 모호한 것이라는 분신 알프레트의 공격을 받는다. 지혜, 진실, 인간 위엄을 목표로 상정했지만 실패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모두 아셴바흐 자신의 자의식이다. 타치오의 아름다움에 도저히 다가갈 수 없다는 절망감은 그로 하여금 "노년이 이 세상 불순물 가운데서 가장 불결하다"고 외치게 한다. '미란 사람을 절망케 하는 것'이라고 발레리는 말했는데 그 비극적 현상학을 꼼꼼하고 뻐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의식과 사고에 관한 한 어떠한 내면 표출의 연기도 언어를 통한 표현과 인지를 따르지 못한다. 여기에 지금 퇴락해 가는 문학의 대체할 수 없는 영광이 있다.

널리 읽힌다는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오미는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지식인이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사람이면 대개 좌파로 인식된다고 말하고 있다. 밀라노 귀족 가문 출신인 비스콘티는 그런 유형의 극단적이고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귀족적인 생활을 즐기면서 이념적으로는 급진파로 일관했던 그는 이 영화가 보여주듯 경직된 이념 예술가는 아니다. 내면 탐구에서 독자적 경지를 이룬 작가 정찬의 단편 '베니스에서 죽다'는 이 영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특히 읽어 볼 만한 작품이다.
*** 2007. 3. 9 세계일보 기재 글을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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