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 '12

몬테네그로 코토르에서

eunbee~ 2012. 6. 19. 13:17

 

 

알바니아 국경을 넘어 몬테네그로 땅에 들어왔다.

우리는 코토르Kotor라는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중세도시를 보기위해 차를 달린다.

 

 

몬테네그로Republic of Montenegro는 발칸반도 남서부에 위치.수도포드고리차Podgorica.

디나르알프스산맥의 경사면에 가려 어두운 산지가 많기 때문에 '검은 산Montenegro'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국토 면적이 14,026㎢로(경기도의 1.3배) 작은 나라이며 인구는 70만명 정도, 그중 포드고리차(수도)에 15만명이 거주한다.

뒤로는 높은 산이 있고 아드리아해의 구불구불한 리아스식해안이 아름답게 펼쳐져있어 해수욕장이 많단다.

 

 

몬테네그로는 500년 전까지 독립국. 1차 세계대전 중 1916년에 세르비아에 점령 병합.

2차대전 티토에게 협조한 보상으로 티토가 몬테네그로를 유로연방 내 자치공화국 지위부여.

그후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연방으로 남았으나 2006년 6월 국민투표에 의해 독립국가로서 UN에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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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Josip Broz. 1892. 5. 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근처 쿰로베츠~ 1980. 5. 4 유고슬라비아 류블랴나.

 

1943년부터 유고슬라비아를 효과적으로 이끌었으며, 1953년 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80년까지 재직했다. 1948년 공산주의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즉 티토주의를 창시하여 소련에 도전했다.

 

대외적으로 티토는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해 비동맹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중립정책을 추구하는 동안 그는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와 협력하여 25개국이 참여한 비동맹회의를 소집했다. 1962~70년에 티토는 이러한 정책을 확대하기 위해 아프리카·아시아·중남미의 여러 국가들을 순방했다. 1968년 8월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티토는 "이러한 소련의 행위는 사회주의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전세계의 사회주의적이며 진보적인 세력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라고 소련을 비난했다. 이후 그는 정규군을 강화하기 위해 파르티잔 부대를 창설하고 방위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병역법이 제정되어 남자의 경우 병역 의무가 65세까지 확대되었고, 19~40세의 여성들은 민병대에 배치되었다. 1970년 9월 티토는 집단지도체제의 수립계획을 발표했고, 이 계획은 1974년 헌법으로 공식화되었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하자 유고슬라비아의 통치형태는 집단지도체제로 이행했다.

티토가 저항운동의 지도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결단력, 적응력, 도덕적 열정, 강인한 체력, 유머 감각 등은 독립 후 30년 이상 유고슬라비아에 안정된 지도력을 제공했다. 티토는 해외뿐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를 자주 여행했다. 1970년대초 그는 원로 정치인으로서 존경받았고, 3번째 부인인 요반카 부디사블례비치와 함께 베오그라드나 브리오니 섬 휴양지에서 살았다. 그는 사진찍기·사냥·낚시 등을 즐겼으며, 유럽에서 옷 잘 입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이었고 훌륭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검색 자료- 다음 백과사전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을 강력하게 이끌었던 티토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생략했으니, 그에 대한 자료를 자세히 읽을 것을 권함.

발칸을 이해하는데에 매우 중요한 인물.**

 

 

 

우리버스는 3시간 이상을 산길과 해안이 내려다 보이는 길을 달린다.

고갯길은 높아 해발 1680m고지라는 표지도 보이고, 휘돌아드는 산벼랑에는 노란꽃이 눈부시다.

검고 희끗희끗한 바위산은 때로는 정답게 때로는 위압적으로 눈앞에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구불거리는 산길은 멀기도 하다.

 

 

 

 

 

 

코토르가 보인다.

코토르Kotor, 남부유럽에서 가장 깊숙히 육지로 파고든 피요르드 해안에 자리한 도시.

12c에 건설된 중세도시의 전형. 최초로 기록된 역사는 기원전 168년. 로마제국 시절에는 로마의 속주,

유스티아누스 1세 때 요새가 건립되었고, 810년에는 사라센이 약탈,1002년 불가리아제국의 통치,

그후 불가리아 황제가 이 도시를 세르비아에 할양.

1420-1797년 베네치아공국의 지배.한때는 오스만투르크의 통치하에도 놓여있었다.

그 후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제국 등의 지배. 2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에 통합.

1945년 이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의 몬테네그로자치국 도시로 편입되었다.

 

 

오~~ 반가운 아드리아해!!

 

 

 

 

 

 

 

 

노란꽃이 지천인 산벼랑길을 휘돌아 해안으로 내려왔다.

 

 

 

이 항구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ㅎㅎ 무얼 먹었는지 생각도 안나네.

 

 

 

시내로 바싹 다가선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에는 성벽이 있다.

 

 

'몬테네그로'의 아드리아해는 *'마레네그로Marenegro'인가? 왜 이리 시커먼스얌? ㅋ

*'마레네그로Marenegro'  검은 바다 -eunbee 신조어- ^*^

 

 

 

깎아지른 듯한 Lovcen山부터 이어진 성벽은 도시의 중심까지 성문, 성채, 탑, 보루 등으로 함께 남아있다.

코토르성벽은 고대국가 일리리아Iilyria부터 시작하여 비잔티움, 베네치아공화국을 거쳐 1800년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이어지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단다. 그래서 일리리쿰Iilyricum, 비잔티움, 베네치아, 오스트리아의 축성법이

혼합되어있는 성곽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구조는 대부분 베네치아 시기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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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리쿰(라틴어: Illyricum)은 일리리아 왕국의 자리에 세워진 로마 속주이다. 현대 알바니아드린 강부터 북부의 이스트리아, 동부의 사바 강까지에 위치해 있다. 수도는 현대 크로아티아스플리트 근처의 살로나이였다.

일리리아 왕국은 기원전 168년 로마군이 일리리아 왕 겐티우스의 군대를 격파한 뒤 로마의 일부가 되었다. 기원전 167년 일리리아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으며, 초기에는 일리리아, 달마티아, 이아피디아리부르니아의 4개 괴뢰 공화국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곧 일리리쿰 속주로 재편되었다. 이 지역에서 로마의 세력권이 커짐과 함께 새로운 영역이 계속 일리리쿰에 흡수되었는데, 로마가 이 지역의 패권을 완전히 확립한 것은 기원전 11년 판노니아를 완전히 점령하면서부터였다.

9년의 판노니아, 달마티아인들의 반란이 10년에 진압당한 뒤 일리리쿰은 북쪽의 판노니아와 남쪽의 달마티아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일리리쿰이라는 이름 자체는 계속 일상적으로 쓰였으며,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사분통치가 시작되며 판노니아, 노리쿰, 크레타, 그리고 트라키아를 제외한 모든 발칸 반도가 "일리리쿰"으로 명명되었다.

**위키백과사전 검색자료.

 

이 도시와 주변지역은 1979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나,

같은 해 4월 15일 대지진으로 건물의 70%가 파괴되는 대재앙을 겪게 되어 세계위험유산으로도 지정하고,

적극적인 복구작업의 결과로 대부분 복구되었으며 2003년에는 세계위험유산에서 해제되었단다.

 

城 안으로 들어가 보자.

 

 

로컬가이드가 왔다. 그녀의 말소리는 오페레타를 듣는 듯 우아하고 감미로웠다.

설명 내용은 위에 기술한 내용이었겠지? ㅎㅎ

 

 

중세도시를 보고파서 찾아온 사람은 우리 뿐만이 아니네.

 

 

코토르의 시계탑

코토르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도심의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탑은 1602년에 세워졌고

1667년 대지진으로 서쪽으로 기울게 되었단다. 그후 시계탑을 바로 세웠지만 1979년의 지진으로 다시 기울어졌단다.

바로크 양식을 일부 사용했으며 북쪽과 동쪽면은 고딕양식, 시계탑 아래에 있는 기둥은

'수치의 기둥(Pillar of Shame)'이라는 이름으로, 죄인을 세워두어 코토르 시민이 그의 얼굴을 알 수 있도록 했던 곳이란다.

 

 

성 안 광장 한켠에 있는 카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코토르의 예쁘고 상냥스런 아가씨들,

이 사진을 찍은 다음에 자기들이랑 함께 찍자고 하면서 옆 테이블 남자에게 사진기 부탁을 하던

여인은 한국친구가 있다고....  굵은줄무늬 아가씨는 그래서 내가 반가웠나 보다.

어딜가나 사람이 더 반가워~ㅎ

 

코토르..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