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 '12

부쿠레슈티로 돌아와

eunbee~ 2012. 5. 30. 01:00

 

 

시나이아에서 펠레슈성을 보고 다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로 돌아온다.

시나이아에서 부쿠레슈티까지는 버스로 3시간.

비는 오다가 그치고, 다시 내리기를 반복한다.

 

부쿠레슈티는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수도라지.

 

 

유채꽃이 노란 들판, 목초가 푸른 들판, 갖가지 색으로 변하는 평원을 실컷 바라본다.

 

 

 

ㅠㅠ~ 참으로 조악한 사진이지만 그러함에도 루마니아 들녘을 지나며 이 시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태리와 함께 주축국의 일원으로 연합국과의 전쟁에 참전했던 루마니아는 나찌독일에게 석유를

공급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단다. 연합국은 아프리카의 북단에서 폭격기를 띄워 이곳의 석유공급시설을 초토화 시키려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 기어이 석유공급 루트를 차단했단다. 지금도 석유채유 시설에서 생산해내는 석유는 자국의 소비의 50%를

충당한다니, 넓은 들판을 지나는 송유관은 허투로 볼 일이 아니다. 나그네 입장에서라도 말이다.ㅋㅋ

 

 

 

이런곳을 달리는 기차에서 보면 기차는 원을 달리는 듯 하겠지?

평원을 달리는 기차! 한 번 타보고 싶어진다.

 

 

비는 끈질기게도 온다. 부쿠레슈티 시내로 접어들었으나 비는 오고, 시간은 없고...에구구구~

 

위 사진은 파리의 샹젤리제거리를 본따서 만들었다는 거리로 혁명광장 앞 도로.

부쿠레슈티는 '동유럽의 작은 파리'라고 불리우며, 부쿠레슈티란 말은 '기쁨이  샘솟는 곳'이란다.

버스로 시내를 돌아보니 도시이름답게 공원에는 울창한 나무로 꽉들어차있고, 아름다운 건물과 명품부띠끄가 들어서 있는 거리는

파리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가로수의 도시, 공원의 도시라고 한다는데 나그네가 스쳐지나면서 봐도 그런말이 맞다는 느낌이다.

 

자전거 도로와 보행로가 잘 분리돼 마련되어있으며 가로수는 우리의 관념속의 크기가 아니다.

이건 아예 수백년 묵은 고목처럼 우람한 나무들이 가로수로 서 있다.

여길봐도 저길봐도 푸르고 푸른 공간(공원?)이 온도시에 가득하다.

 

 

차우세스쿠 궁전 (의회궁) 또는 '인민을 위한 집' 인민궁전

이름은 그러하나 챠우세스크의 독재의 망상이 한껏 난무한 건물로 단일 건축물로는 미국무성 펜타곤 다음으로 큰 규모란다.

차우세스크(1918~1989)는 이건물을 짓기 위해 이곳에 있던 중세의 고풍스런 주택 7000여채와 교회 15곳을 비롯한 역사적인 건물을

강제철거하여 7만여명의 이주민을 강제이주시켰다. 김일성과 가까웠던 그가 북한에 가서 김일성의 통치스타일을 보고

배웠대나 어쨌다나...ㅋㅋ  그는 이건물이 완공되기 전에 총살형에 처해지고, 정작 이건물에서 환호를 받은 것은

마이클잭슨이 와서 공연을 하던 때였단다. 마이클잭슨은 공연을 보러온 수많은 부쿠레슈티 시민들에게

공연이 끝나고 인사를 할 때, "고맙습니다.부다페스트 시민 여러분!!" 했다나? 하하하~

 

90년대 초반 두 딸이랑 부다페스트에 갔을 때, 어부의 성 옆 어느 유서깊은 장소에서 마이클잭슨 공연이 며칠전에 있었다면서

공연시설물들을 철거하는 것을 보았으니, 마이클잭슨이 부다페스트와 부쿠레슈티를 헷갈려 했음직도 하다.ㅎ

 

 

인민궁전은 현재 하원의원 사무실, 국제학회장, 결혼피로연장 등으로 사용되며 일반에게도 공개된단다.

3000여개의 방에 3500개의 샹들리에와 벽과 천정 그리고 화장실까지도 금도금을 했다니

한 번쯤 볼만도 한데....우린 그냥 페쑤~ㅠ

 

 

차우체스쿠 부인이 원장으로 있던 학술원 건물이 멀리 보인다.

과학이나 학문에는 일자무식이었던 엘레나는 학술원 직원들에게는 물론 국민들에게도 웃음거리가 되었단다.

 

 

 

 

비는 주룩주룩, 버스에 앉아 아름다운 거리를 본다.

 

나는

28년전 첫 유럽여행 때, 파리에서 만난 루마니아 남자 미첼을 떠올리고,

그리고 영화에서 만난 루마니아의 실상 '4개월 3주 2일'의 주인공

그 여자(어린 여대생이었지)의 참담한 현실을 되새겨 본다. 비에 젖은 루마니아의 수도에서...

 

이래저래 비오는 날의 먼먼 버스드라이브는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또한 내겐 좋은 시간이다.

 

 

 

 

시내 어느 도로에는 파리의 개선문을 본딴 그것보다 더 큰 개선문도 있다는데...

고풍스런 수도원도.. 비잔틴 양식의 작은 교회도 많다는데, 그리고 이도시에서 가장아름다운 공화국 광장도 있다는데...

우린 본 것이 없다. 아름다운 부쿠레슈티도 이렇게 이별하고 어제밤 늦은 시각에 도착해서 여독을 풀었던 호텔,

루마니아에서 가장 크다는 Rin Grand Hotel로 발길을 옮긴다.

 

이밤이 지나면 국경 하나를 넘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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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에 태어나 1989년에 처형당함

 

사회주의체제하의 루마니아의 초대 대통령(1974~89)을 지냈다. 루마니아가 소련 권역에 속한 여러 나라 가운데서 독자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0년대초 루마니아 청년 공산주의 운동원으로 이름이 높았던 체아우셰스쿠는 공산당 활동으로 1936년과 1940년에 투옥되었다. 그는 1944년 8월 파시즘에 반대하는 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에 탈옥하여 공산주의 청년 동맹의 서기(1944~45)가 되었다. 1947년 공산당이 정권을 잡자, 농무장관(1948~50)이 되었다가 1950~54년 소장 계급장을 달고 국방차관으로 일했다. 스탈린주의를 신봉하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게오르게 게오르기우 데지의 심복으로 알려졌던 그는 마침내 공산당 정치국과 서기국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당서열이 제2위로 높아졌다.

1965년 3월 게오르기우 데지가 죽자, 체아우셰스쿠는 그의 뒤를 이어 공산당 제1서기로서 당의 지도자직을 계승했다(서기장직은 1965년 7월부터 맡았음). 그후 1967년 12월에 국가평의회 의장까지 맡게 되자, 그는 바야흐로 국가의 수반이 되었다. 1965년 그가 권력을 잡을 당시에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루마니아에 대한 소련의 지배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독자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정치 노선으로 곧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1960년대에 루마니아는 사실상 바르샤바 조약 군사동맹에 형식적으로만 참여했을 뿐이며, 체아우셰스쿠는 바르샤바 조약국들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1968)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1968년 11월 그는 사회주의 통일전선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4년 3월에 공화국 대통령직이 신설되자 초대 대통령이 되어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을 겸임하면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체아우셰스쿠는 외교면에서는 자유주의적이고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한 반면 국내 정치에서는 공산당에 의한 권위적인 중앙집권화 정책을 더욱더 엄격하게 고수했다. 그는 비밀경찰조직을 통해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매체들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국내의 어떠한 불만세력이나 반대세력도 허용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그의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 때문에 생겨난 엄청난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1982년 체아우셰스쿠는 국내에서 생산된 농공산물 가운데 상당량을 수출하도록 조치했다. 그 결과 식품·연료·에너지·의약품을 비롯한 각종 생필품이 극도로 부족하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던 루마니아는 아사 일보직전의 비참한 상태로 전락했다. 체아셰스쿠는 또한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대대적으로 벌이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권력을 더 공공히 하고자 부인 엘레나를 비롯하여 그의 일가족 가운데 상당수를 정부와 당의 요직에 앉혔다. 그는 실행할 수도 없는 많은 계획들을 과시용으로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는 수많은 마을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주민들을 새 아파트로 이주시키겠다는 것도 있었다.

1989년 12월 17일 체아우셰스쿠는 티미쇼아라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대에 발포할 것을 군대에 명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권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위는 부쿠레슈티로 번졌으며 12월 22일 루마니아의 군대는 시위자들에게 굴복했다. 그날 체아우셰스쿠는 부인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수도를 탈출했지만 무장군인들에게 체포되어 다시 호송되어 왔다. 12월 25일 대량 학살을 비롯한 여러 죄목으로 기소된 체아우셰스쿠 부부는 특별 군사법정에서 긴급재판을 받았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두 사람은 총살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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