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해질 무렵

eunbee~ 2010. 10. 30. 05:47

해질 무렵

 

                                정 채 봉

 

 

햇살도 짐승들도 다소곳해지고

억새풀마저도 순해지는

해질 무렵을 나는 사랑한다.

 

 

집 밖에서 큰소리치며 떠들던 사람들도

이쯤에서는 기가 꺾여서 연기나는 집을 돌아보고,

병원의 환자들은 몸 아픔보다도 마음 아픔을 더 많이 앓는다는 해질 무렵,

고교시절 잘 풀어지지 않는 수학문제도 이때만은 밉지 않았었다.

 

 

정처없이 흐르는 구름에 손을 흔들고 싶은 다감한 때,

산자락에서 풀을 뜯던 소도 산그리메가 내를 건너면

음메에 하고 주인을 찾는 것은 외양간에 갇힐망정 집이 그리운 때문이리라.

 

 

돌산도 이 때만은 보랏빛에 젖어 신비해지고

강에 비친 골짜기도 가장 선한 표정이 된다.

 

 

나는 해질 무렵을 신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고향에 돌아와 있어도 성에 차지 않는 외로움이 남고

그리운 이 곁에 있어도 해질 무렵에는 그리움이 일지 않는가.

이는 인간에게 있어 본래의 거처가 본래의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라 본다.

 

 

아아, 이때만은 저녁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면 어떠랴.

풀벌레 소리 한낱에도 두 손을 모으게 되는 것을.

이 시간에 새들 소리를 들어보라.

예민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만히 귀 기우리고 들으면

해뜰 무렵 다르고 해질 무렵 다른 것을 알아 챌 수 있으리라.

 

- 중략 -

 

 

후일, 신이 만일 나한테 이 세상을 하직할 시간대를 택하라면

두 말 않고 해질무렵이라고 대답하겠다.

 

 

** 사진. 2010.10.27. 일몰 후,

쏘공원 까마귀 날아드는 마로니에 숲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