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가
책장을 덮어둔 채 하늘을 봅니다.
하늘엔 지금 막 여름이 날개를 펴고
하얀 끝자락을 펄럭이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습니다.
하루키의 이야기도, 계절도, 허공에서 사뭇 공회전을 하고 있습니다.
어딜 봐도 허허로움을 채울 그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책을 잘못 택해서 나왔구나..하다가,
아니 이 풍경 이시각과 너무 잘 어울리는 책을 골라 들었구나 합니다.
***
그녀는 빙긋이 미소 지은 채 잠시 허공에 눈길을 주었다.
웬지 이상해. 모든 게 실제로 일어난 일 같지가 않아.
아니, 정말로 일어난 일이야. 다만 사라져버렸을 뿐이지.
괴로워?
아니,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無에서 생겨난 것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뭐.
우리는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아주 오래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때를
나는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이제 그만 가 보는 것이 좋겠어, 하고 그녀가 말했다.
실제로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웠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담배를 밟아 껐다.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잘 지내, 하고 그녀는 말했다.
고마워. 안녕, 잘 있어, 하고 나도 말했다.
나는 핀볼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곳을 빠져나와서 계단을 올라가 레버 스위치를 내렸다.
마치 공기가 빠져나가듯이 핀볼의 전기가 꺼지고, 완전한 침묵과 잠이 주위를 뒤덮었다.
다시 창고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 전등 스위치를 끄고 문을 닫을 때까지의 긴 시간 동안 나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 중에서
하루키를 내려 놓았습니다.
다시 머리가 텅비어 오며 윙윙 내 머릿속에서도
하루키의 언어들처럼 무수한 말들이 둥둥 떠다니며 공회전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하루 해도
한 계절도 속절없이 스러져 가려합니다.
어머나~ 우리가 Old Country에 머물고 있었네요.
여기는 오래전에 세상에 있었던 Old Country 예요. 그렇죠?
여인은 내게 말하고 웃으며 떠납니다.
그녀도 그렇게 가버렸습니다.
그래, 우리네 본향은 여기 같은 곳 일지도 몰라.
Old Country~
그 말 참 좋아요.
가을이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습니다.
엉겅퀴의 보라빛꽃은 다시 하얀솜꽃으로 피어나서
여름을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까마귀도 제 둥지로 날아 들고
해는 저물었습니다.
이 오래된 Old Country에서
숨어 든 가을과 아직은 떠나기 싫은 여름이
숨바꼭질하고 있습니다.
해저문 들판 같은 마음으로
하루키를 안고 돌아섭니다. 나는.....
아직도 허공에서 헛돌고 있는 말들을 주워 담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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