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오누이가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오빠는 아주 오래된 기억의 갈피 갈피속에 숨어있는
못내 그리운 시절을 길어 올린다.
명동...
돌체다방에서 듣던 흐느끼는 가락의 여운
쎄씨봉의 푸른 담배 연기
공초 오상순의 사슴담배와 그 손끝에 매달린 꽁초...
국도극장, 시민회관.../시민회관이 그시절엔 시공관이라 했다네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댕댕댕 거리며 느리게 달려가던 전차.
대학에서 강의가 끝나면
친구들과 마시던 도로시 위스키 몇 잔,
거나하게 취기오른 호기롭던 청춘
때는 1950년대 末 즈음.
그 오빠가 보내주던 자유문학, 현대문학,
사상계를 읽으며 학창시절을 윤택하게 했던 나.
손목시계도 오빠가 처음으로 나에게 사 주었지.
때는 1950년대 末. 60년대 初, 내가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오빠의 휴가 가방속엔
그림이 곁들여진 詩畵集이 있었지.
내 오빠의 自作詩
나는 오빠 몰래 그 걸 읽고 또 읽었었지.
그리고는 감탄하고 가슴속 저 안으로 새겨놓던 기억
'우리 오빠는 참 멋있어. 낭만쟁이야.'
세월은 속절없이 흐르고
아무것도 기약한 것 없는 오누이는
그렇게 철없는 삶을 살아갔지.
푸나무 가지속처럼 엷은 오빠의 意志는
그 낭만의 줄기를 지탱해 두기엔
너무도 가냘펐지.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도 흐른 뒤
때때로 꺼내 보고는
보물처럼 다시 덮어 두는 오빠의 낭만이
너무너무 서러워
나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걸 어쩌지?
청춘의 한 페이지를 넘겨보며
명동...그 거리를 다시 걷고 싶어하는
오빠의 옆 얼굴엔 회색빛 안개가
돌체다방의 음악처럼
쎄씨봉의 담배연기처럼
피어 오르고 있구나.
아직도 철없는 누이는
오빠의 그 낭만이
자꾸만 서럽다.
고희를 넘긴 오빠를 바라보며. 2008년 성탄 이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