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편지

기형도를 읽다.

eunbee~ 2008. 12. 18. 17:56

                             도시의 눈

                                            -겨울 版畵 2

 

도시에 전쟁처럼 눈이 내린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가로등 아래 모여서 눈을 털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서 내 나이를 털어야 할까?

지나간 봄 화창한 기억의 꽃밭 가득 아직도 무꽃이 흔들리고 있을까?

사방으로 인적 끊어진 꽃밭, 새끼줄 따라 뛰어가며 썩은 꽃잎들끼리 모여 울고 있을까.

 

우리는 새벽 안개 속에 뜬 철교 위에 서 있다. 눈발은 수천 장 흰 손수건을 흔들며 河口로 뛰어가고

너는 말했다. 물이 보여. 얼음장 밑으로 수상한 푸른빛.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은빛으로 반짝이며

떨어지는 그대 소중한 웃음. 안개 속으로 물빛이 되어 새떼가 녹아드는 게 보여? 우리가.

 

                                                                                     --기형도 전집-- 중에서   

 

 

스물 아홉 나이에 이승을 하직한 詩人.

'나는 어디로 가서 내 나이를 털어야 할까?'

털어버리기 어려울까봐, 무거운 나이가 오기 전에

그는 그렇게 서둘러 간 걸까?

 

창 맑은 3층 도서관에 앉아, 기형도를 읽는다.

기형도의 詩가 가슴저며 와서, 잠깐씩 속을 삭히느라 자주자주

내려다 뵈는 여중학교 운동장을 바라봤다.

 

운동장엔

바람이 불고

아홉그루의 느티나무는 잎새를 모두 떨구었고

말레콘 앞바다 물빛깔을 닮은 체육복의 여학생들이 파도를 일으킨다.

나는, 

그 바다같이 넘실대는 푸른 몸짓들 사이로 시인의 영혼을 찍어내며

하루를 보냈다.

 

도서관 유리창은 오늘도

참으로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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