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그로브숲

도라지꽃을 보며

eunbee~ 2008. 7. 6. 09:14

 

 우리집 앞 강물은 바람이 불 때마다, 텃밭에 피어있는 도라지꽃을 만지고 싶어서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텃밭 기슭을 쓰다듬고 갑니다.

요즘엔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하여, 강물도 먼산도 한나절이 되도록 눈끝에 잠을 매달고 있습니다.

햇님이 엉덩이를 찰 때까지 그러고 있을 모양입니다.

이러한 入夏의 濃霧서린 아침에, 반짝 눈을 뜨고 있는 것은 도라지꽃 뿐입니다.

 

강물이 도라지꽃을 애무하고 싶어 하듯, 도라지꽃 또한 강물을 연모하나 봅니다.

수백 송이의 꽃들은 모두 머리를 , 얼굴을, 강물을 향해 다소곳하게 숙이고 서 있습니다.

이른 봄, 자라날 때부터 키워 온 그리움인가 봅니다.

어느꽃 하나 빠짐없이 모두 모두 강물을 향해 연모의 모습으로, 

애잔하고 그리움 가득한 미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한 철이 다 가도록 만나 질 기미가 없음에도, 서로가 서로를 저토록 그리워하는 마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도라지꽃을 보며,

나 또한 다가올 수 없는 먼 날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 저미는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知天命의 나이를 이제 막 넘어선 막내 동생이 대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즈음,

나와 동생은 여름 방학 여행을 떠났습니다.

덕유산을 등반하고, 계곡물 소리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민박집에서 민박을 하고,

영주에 있는 큰집 오빠네서 하루를 묵고,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계시는 부석사 아랫 동네에서

며칠을 보낸 후, 고수동굴을 탐사하고 돌아 온 여정이었습니다.

 

 

부석사 아랫 마을 소천면.

그곳엔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계시는 곳.

한 여름 땡볕 속에서 우리는 큰아버지네 과수원이 있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큰엄마가 차려 주신 시골 밥상을 받고, 참으로 소박한 음식이구나 하면서

맛있게 먹고, 부석사에 다녀 오겠다고 집을 나섰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부석사는 아름다운 정경으로 거기 서서 우리를 반겨 주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할 때, 서둘러 산을 내려 왔습니다.

어디 만큼 내려 오다가 길 모퉁이를 돌아 서서 밭둑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곳엔 보라빛 청초한 도라지꽃이 저녁 어스름 속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습니다.

어머나~

예쁜 도라지꽃이 반가워서, 밭둑으로 내려 섰습니다.

그 순간, 초라하던 큰엄마네 밥상이 생각났습니다.

도라지를 맨 손으로 캤습니다. 제법 몇뿌리 실한 놈이 나왔습니다.

마음 착한 동생은 '그거 캐면 안되는거 아냐?' 하면서 거들 생각도 하지않고 길가에 서 있습니다.

큰엄마께 갖다 드릴 생각에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고는 바삐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긴 여름 해 마져 이미 서산을 넘은지 오래 입니다.

사위四圍는 어두워졌고, 산모롱이를 몇 개나 더 돌아가야 큰엄마네 집입니다.

동생과 나는 잰 걸음으로 신작로를 따라 부지런히 내려 왔습니다.

'야들아~ 어데 오노~'

어둠속에서 큰엄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늦은 귀가에 걱정이 된 큰엄마는 과수원 밖 찻길까지 나와서 우리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큰엄마, 오다가 도라지 캐 왔어요.'

'야들아, 그거 남의 밭에 심어 놓은 도라지 아닌가?'

'그냥 밭둑 여기저기에 있던데요?'

'그거 남의 집 농사인가 보다.'

나는 대여섯 뿌리도 안되는 도라지를 민망하게 바라보며, 저녁 상에 올릴 야무진 꿈을 몰래 접었습니다.

 

이제는 큰엄마 큰아버지도 이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는 띠동갑 막내동생과 5박6일의 여행을 떠날 만큼 한가한 세월과 체력과 열정도 없습니다.

세월은 너무도 많이 흘러 가 버렸습니다.

다만, 도라지꽃이 핀 걸 보면, 한없이 한없이 그 시절이 그리워 질 뿐입니다.

보라빛 도라지꽃은, 나에게 그 저녁 어스름속의 행복한 시절을 되살게 하는 추억의 꽃입니다.

 

오늘 아침, 강기슭 우리집 텃밭에 핀 수백송이의 도라지꽃이

내 추억의 낡은 일기장 속에서 큰엄마로 큰아버지로,

그리고 막내 동생과의 소박한 여행에 담긴 행복한 시절의 향기로 피어났습니다.

나는 도라지꽃을 보면, 언제나 그 때가 떠 오릅니다.

몹시도 그리운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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