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k(-Alfred-Leslie) Satie
1866. 5. 17 프랑스 칼바도스 옹플뢰르~ 1925. 7. 1 파리.
프랑스의 작곡가.
파격적인 동시에 때로는 재기가 엿보이는 그의 양식은 20세기 프랑스 음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했으나 낙제하여 카페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1890년경 장미 십자 교단과 관계를 가지면서 그 영향으로 〈빈자(貧者)의 미사 Messe des pauvres〉(1895)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다. 1893년 27세 때 화가 쉬잔 발라동과 열애에 빠졌으며, 1898년부터 파리 근교 아르쾨유에서 혼자 비정상적으로 살면서 누구도 자신의 아파트에 오지 못하도록 했다. 40세에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3년간 뱅상 댕디와 알베르 루셀에게 배웠다. 1917년경에는 '프랑스 6인조'로 알려진 젊은 작곡가들이 사티를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그후 그를 기려 다리우스 미요, 앙리 소제, 로제 데조르미에르와 같은 작곡가들이 포함된 아르쾨유 악파가 결성되었다.
사티의 음악은 프랑스 음악에서 19세기 낭만주의와의 분명한 단절을 처음으로 보여주며 아울러 인상주의와도 반대 입장에 선다. 다다이즘·초현실주의 미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그의 음악은 과장된 감정이나 초월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한 전통적 형식이나 조성 구조도 버리며, 패러디 형식을 취해 기괴한 제목을 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배 모양의 3개의 소품 Trois morceaux en forme de poire〉·〈비틀린 태아 Embryons Desséchés〉 같은 제목을 가진 곡이 등장하며 '중병에 걸리듯이', '계란처럼 가볍게'와 같은 연주 기호를 붙여 인상주의자들을 놀리기도 한다.
그의 음악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박하고 괴상한 그의 성격은 때로 충격적이지만 하나의 통일된 인격으로 예술과 삶을 통합시킨다는 아방 가르드의 이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음악에서 과장된 감상을 벗겨내고, 엄격한 정수(精髓)만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를 드러내주고 있는 피아노 소품 〈3개의 그노시엔 Trois Gnossiennes〉(1890)에서는 마디선이나 조(調) 기호가 등장하지 않는다. 〈3개의 사라반드 Trois Saraban-des〉(1887)·〈3개의 짐노페디 Trois Gymnopédies〉(1888) 같은 또다른 초기 피아노 소품들은 새로운 화성을 시도하고 있으며 화성 개척자로서 면모를 보여준다. 발레 음악 〈파라드 Parade〉(1917:레오니드 마신 안무, 장 콕토 대본, 파블로 피카소 무대장치·소품)는 타자기, 사이렌, 비행기 프로펠러, 시계 소리 녹음 테이프, 회전식 추첨기 등이 등장하고 있어 스트라빈스키나 다른 작곡가들에 의한 재즈 요소 사용을 예견한다. 초현실주의라는 말은 아폴리네르가 〈파라드〉에서 표제어로 썼던 말에서 유래한다. 사티의 걸작 〈소크라테스 Socrate〉(1918)는 4명의 소프라노와 실내 관현악단을 위한 음악으로 플라톤의 대화에 토대를 두고 작곡되었다. 5개의 〈야상곡 Nocturnes〉(1919)은 최후의 피아노곡으로 대단히 심각하다. 발레 〈휴식 Relâche〉(1924)은 피카비아와 공동 작업한 것으로 이 작품에는 르네 클레르의 초현실주의적인 영화 화면이 등장하고 있다. 영화 음악 〈영화 Entr'acte〉(또는 〈Cinéma〉)는 사티가 이상으로 삼았던 배경음악('가구'음악)의 일례이다.
그러나 사티는 그의 무례한 태도와 위트를 오해했던 다른 음악가들로부터 사기꾼으로 매도당했다. 그들은 사티의 인생에서 음악 외적인 영향, 예를 들어 마지막 10년 동안에도 가장 친하게 지낸, 카페 피아니스트 시절에 만났던 화가들의 영향에 대해 개탄했다. 그러나 다리우스 미요, 모리스 라벨, 클로드 드뷔시 같은 일류 작곡가들에게도 깊은 칭송을 받았으며 드뷔시와 30년 가까이 친교를 유지했다. 인상주의에 대해 조소하기는 했지만 영향을 주었으며 나중에 신고전주의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인터넷 브리테니커 검색자료]
옹플뢰르 시골에서 상경하여 파리 음악원에서 수학하던 중 낙제를 하는, 별볼일 없어 보이는 에릭 사티는
평생을 '가난뱅이 씨'라고 불리울만큼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 떠납니다. 젊은날 사티는 몽마르트르 언덕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렇게 압생트와 외로움을 친구로 살던 에릭 사티는
어느날 쉬잔 발라동을 보게 되고 그녀를 보자 한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강인하고 용감한 행동에 기가 죽어있었다네요.
쉬잔은 에릭에게 모델이 되어줄 것을 원했고 그들은 6개월간 사랑을 나누었답니다.
어느날 전라의 모습으로 서 있는 쉬잔의 뒷모습에서 에릭은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로부터 에릭은 쉬잔을 여자로 안을 수가 없었답니다. 이런 쯧쯧~
쉬잔 발라동은 그를 떠났고, 쉬잔의 아들 위트릴로는 사티를 따라 가겠노라고 울며 매달렸다지요. 이런 쯧쯧~
쉬잔 자신도 어릴 때 어머니로 부터 버림을 받았으면서 자신의 사생아 위트릴로를 남의 손에 맡기며
돌보지 않았더랍니다. 위트릴로는 너무도 외로웠고 사티에게 많이 기대었었나 봅니다. 인생은 참으로 묘해요.
파리를 떠난 에릭은 아무도 자기집에 들이지도 않고 교류도 없이 혼자 사는 옹고집의
특이한 생활을 하다가 59세에 세상을 뜬답니다. 그가 죽은지 38년만에 그의 음악이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여진 계기가 그를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하였고, 진정한 예술가로서 재평가 받게 되었답니다.
에릭 사티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계기는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의 '도깨비불'이라는
영화음악으로 그의 음악이 쓰여지게 되자 큰 반향을 일으키고 부터라지요. 역시 인생은 참으로 묘해.
죽은지 38년 만에.... 기적이 아니라 그의 진정한 예술성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겠지요만.
맨 위의 더보기의 [에릭 사티]를 읽어보시면 그의 진가를 엿보게 됩니다.
짐노페디
하모니카와 하프의 앙상블, 참으로 아름다워요.
쉬잔 발라동이 그린 젊은 날의 에릭 사티
짐노페디만큼 유명한 그의 그노시엔느를 올려 둡니다.
나는 이 곡이 짐노페디보다 듣기가 좋아요. 좀더 변화있고 섬세하다고 할까.
이 외에도 두 곡의 Gnossienne를 더 감상했지만, 여기에 옮기는 것은 생략.
에릭 사티의 피아노곡은 어두운 곡만이지 않아요. 매우 명랑하고 즐거운 멜로디의 곡도 찾아 감상하시길.
'나는 당신을 원해요.'
1897년 에릭 사티가 쉬잔 발라동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만든 곡
사티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쉬잔 발라동. 그녀의 뒷모습을 본 어느날의 사티는
그녀에게서 에릭이 사랑하던 어머니를 느껴 다시는 곁하지 않았다지요.
그것이 비극이었을까요? 몰라 몰라 사람들 특히 남녀간 또는 연인의 일은 아무도 몰라.ㅎㅎㅎ
그렇거나 말거나
[난 너를 원해Je te veux]는 결혼축하곡으로 자주 연주 된다지요.
몇 개의 작품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어찌 알 수 있을까요.
다만 후대에 회자되고 떠도는 풍문처럼 또 그렇게 남의 이야기로 듣고 읽고 말 할 수 밖에요.
내 사랑을, 내 쓸쓸함을, 내 고뇌를 거기에 섞어 달래볼 밖에요.
이런 음악과 이런 이야기는 푸른저녁 깊은 울림으로 온몸과 온마음에 와닿는 목소리처럼
내 삶을 윤기나고 아름답게 해줍니다.
쉬잔 발라동과 그의 아들 위트릴로가 살던 집
지금은 레스토랑겸 카페 La Maison Rose
- 며칠 전 몽마르트르에서 찍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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