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후안 헬만을 읽고 싶어 하는 블벗을 위해

eunbee~ 2013. 9. 9. 09:33

 

 

 

새 한 마리 날다가 그만둔다...

 

새 한 마리 날다가

그만둔다/ 날개를 잊고 싶어/

무에서 허공으로 솟아올라 물질이 되고

 

태양 속 빛처럼 잠이 든다/ 아직 되지 못한 것이

된다/ 들어가 나가지 않는

꿈과 똑같이/ 죽음으로 사랑의 곡선을

긋는다/ 우연에서

 

세상으로 간다/ 제 차례를 맞은 일에

얽혀 들어/ 고통에서 고통을

거둬들인다/ 두 눈을 뜨고

 

명료한 환각을

그린다/ 미완성의

노래를 부른다


 

***

 

넌 나무들과 얘길 나눈다...

 

넌 나무들과 얘길 나눈다/

노래하는 이파리들

해를 모으는 새들이 있는 나무

 

너의 침묵은

세상의

외침을

깨운다/

 

 

2013. 5. 2 에게해


 

당신의 쾌활함에는 죽음을...

 

당신의 쾌활함에는 죽음을

궁지로 몰아넣는 우아함이 있다/ 이제 지나 버린

그래서 어두운 권능을 되돌려 주는

 

날들과 더불어 고통을 잠재우는

거울을 등지고 앉는다/ 거리를

떠도는 추방당한 어둠이

가면을 쓴 채 지나고/

 

상념이 잎을 떨구는 사이

공포는 태양을

즐긴다/ 이미 허공에선

 

실을 풀고/ 이루지 못한

열정이 가혹하다/ 그리고 결코 만들어지지

않은 얼굴은 전복된 영혼

 

***

 

 

내 사랑 부에노스아이레스

 

밑 빠진 의자 모서리에 앉아,

울렁증에 병들어 다 죽어 가면서도,

내가 태어난 도시가 이미

흐느꼈던 시를 쓴다.

 

그 시를 붙들어야 한다. 여기에서도

내 사랑스런 아이들

그 많은 형벌 가운데서도 널 아름답게 하는 아이들이 태어났으니까.

저항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가 버리는 것도 말고. 머무는 것도 말고,

저항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분명 더 많은

아픔과 잊혀짐이 있을지라도.

 

(후안 헬만이 옥중에서 쓴 시)


 


 

최후

 

한 남자가 죽었고 사람들이 찻숟가락으로 그의 피를 모으고 있다.

친애하는 후안, 넌 마침내 죽었다.

따스함에 적신 너의 조각들은

네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네가 작은 구멍으로 사라져 버리는데

어떻게 누구라도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아

널 여기 남아 있게

해 주지 않는 거지.

 

죽기 전에

세상 모든 분노를 다 먹어 버렸을 테고

그다음엔 유골에 기대

슬퍼하고 또 슬퍼했었지.

 

형제여, 너를 이미 땅 밑으로 내려놓았어,

땅이 너로 인해 떨고 있다.

불멸의 분노가 밀쳐 내는

그 손이 어디에서 싹트는지 잘 지켜보자고.

 

 

***

 

시인 구광렬 님은 후안 헬만과는 친구사이. 그들의 첫 만남은 1997년 어느 봄날, 구광렬 시인의 또 다른 친구

우루과이 시인 사울 이바르고엔이 주간으로 있던 멕시코 엑셀소르신문사에서 였다고 한다.

사울 이바르고엔과 후안 헬만은 1930년생 동갑내기이며, 남미 출신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

 

시집 [새 한 마리 내 안에 살았지] 말미에는 구광렬 시인이 <자네의 심장은 바이올린이라 했지>라는 제목으로,

시평과 그와의 인연을 이야기한 글이 실려있다. 그 글 말미에

'바이올린 심장을 가진 친구, 후안 헬만을 위해 쓴 시 한 편을 덧붙인다'며 올린 시를 나는, 

여기에 옮긴다.

 

 

지금쯤 아르헨티나에 있었으면 하는 자네에게 편지를 쓴다네

편지 여백에 암소 한 마리와 당나귀 한 마리를 그려 둠세

자네가 이 편질 읽을 즈음 암소의 젖에선 자네가 좋아하던 Alpura표

우유 냄새가 풍기고 유난히 크게 그려질 당나귀 귓바퀴에선

아, 에, 이, 오, 우

우리 시절의 인사가 성탄 종소리처럼 풀어졌으면 하네

 

아 참,

자네 침실 앞 쓸쓸한 망고나무를 위해 새 한 마리 그려 넣는 것도

잊질 않겠네 하지만 색칠은 자네가 하게

시절이

빨간색을 원하면 빨갛게

노란색을 원하면 노랗게

아님 그냥 편지지 색으로 두든지

그래도 자넨 파란색으로 칠할 걸세

색깔이 다르다고 새소리까지 다르겠냐는 둥

엄살스런 군더더기까지 붙이며 말이야

 

참 자네 심장은 바이올린이랬지

언제 꽃 한 송이 자네 혈관 편으로 보내겠네 그 향기 또한 자네가 정하게

손으로 만지는 향기

귀로 듣는 향기

눈으로 보는 향기

하지만 자넨 쉬 권태에 빠질 코를 위한 향기는 원치 않을 걸세

 

언젠가 페론의 마누라가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지어다' 시건방 떨 때

자네의 눈은 아르헨티나를 위해 피눈물 흘렸고

자네의 입은 아르헨티나를 위해 또 울부짖었지

죽을 때도 서서 죽은 '체 게바라'처럼

천만 번 죽어도 결코 무릎 꿇지 않으리라.....

결국 자네 심장이 켜 대던 음악으로 아르헨티나의 귀는 뚫리지 않았나

 

역시 자네 군더더기엔 질퍽한 향기가 있네 그려

이제 조국 아르헨티나에서도 살 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넨 답했지 바이올린 심장을 뜨겁게 연주해 줄 여인이

더 이상 그곳엔 없다고....

더구나 연주회는 밤낮 열려야 한다고

친구여, 미구에 자네의 그 바이올린 심장을 나에게도 차용해 줄 수 없겠나

비록 연주해 줄 여인은 없지만

 

아무튼 이 편지는 아르헨티나로 갈 걸세. 잘 있게

 

                                                                        2012년 겨울

 

                                          바이올린 심장도, 연주해 줄 여인도

                                                          주위에 없는 친구, 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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