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자락의 백담사를 지나서, 수렴동계곡을 오릅니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가을은 하루 해를 품고 붉은 향기로 깃듭니다.
나그네는 백담사에서 3.5km떨어진 영시암을 향해 오르며, 가을에 안기고 만산홍엽에 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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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온 사진에 곁들여, 곰팡내나는 책 속에서 꺼낸,
이외수 님의 글을 함께 옮깁니다.
방랑
아무런 행선지도 없이 떠도는 일이다. 떠돌면서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는일이다.
외로운 목숨 하나 데리고 낯선 마을 낯선 들판을 헤매다 미움을 버리고 증오를 버리는 일이다.
오직 사랑과 그리움만을 간직하는 일이다.
새
저 세상에서건 이 세상에서건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새가 된다.
사무치는 그리움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이 제일 먼저 새가 된다.
새가 되어 윤회의 길목에 날개를 접고 앉아 그리운 이가 오기를 기다린다.
같은 그리움을 가진 영혼들끼리 같은 날개를 가진 새가 된다.
사람들은 엽총을 만들어 도처에서 새의 심장을 겨누지만 결국 살해당하는 것은 새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다.
시간
탄생과 소멸의 강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강에서 태어나고 그 강에서 죽는다.
그러나 흐르지는 않는다. 흐르는 것은 시간의 강이 아니라 그 강에 빠져 있는 물질들이다.
출발점
과거를 끊어낸 자리. 미래의 생장점生長點. 현재 바로 그 자리. 윤회의 매듭점.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자리. 시간과 공간의 소실점逍失點. 인생의 모든 새벽.
불행
행복이라는 이름의 나무 밑에 드리워져 있는 그 나무만한 크기의 그늘이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그 그늘까지를 나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길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길을 만든다. 인간들은 멀리 있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길을 만든다.
땅 위에도 만들고 땅 속에도 만든다. 하늘에도 만들고 바다에도 만든다.
그러나 인간들은 본디 자신들이 어느 길로 왔으며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를 대다수가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한자어로는 그 길을 도道라고 표기하며 개개인의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설파되어 왔다.
멋쟁이 길동무를 소개합니다. 블친님들이 eunbee로 착각을 하셔서 해명성 사족 ㅋㅋ
다리
미지로 가는 건널목이다. 떠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건널목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건널목이다.
밑에는 언제나 강이 흐르고 위에는 언제나 허공이다. 다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관절이다.
땅 끝까지 이어진 해후의 사다리다.
눈물
지상에서 가장 투명한 시詩.
예술
술 중에서는 가장 독한 술이다.
영혼까지 취하게 한다. 예술가들이 숙명처럼 마셔야 하는 술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그들의 술주정에 의해서 남겨진 흔적들이다.
거기에는 신도 악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뿐이다.
먼지
모든 우주의 출발점. 모든 우주의 귀착점. 모든 우주의 중심부.
철학의 저울대에 올려 놓으면 성단 하나로 추를 삼아도 무게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크지만
그 형체는 매우 작다. 화창한 날씨에 육안으로 보면 햇빛에 미세하게 반짝거리며 공기보다 가벼운 느낌으로
허공에 떠다니는 광경을 포착할 수 있다. 우주 어디에나 산재해 있으며 똑같은 모양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먼지는 산이 되기를 서두르지 않는다. 먼지는 바람을 역류하지 않는다.
오직 여여할 뿐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니 바로 그 속에 부처가 있다.
재
불에다 살과 뼈를 모두 주었다.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을 때는 존재의 아름다움도 알지 못했다.
지금은 실낱 같은 바람 한 가닥에도 환희로 전율하는 존재의 미립자로 남았다.
비로소 무소유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낙엽
수확의 가을이 끝나면 나무들은 잎을 떨구어 자신들의 시린 발목을 덮는다.
바람이 불면 세월의 편린처럼 흩날리는 갈색 엽신葉信들.
모든 사연은 망각의 땅에 묻히고 모든 기억들은 허무의 공간 속에 흩어져 버린다.
나무들은 인고의 겨울 속에 나신裸身으로 버려진다.
낙엽은 퇴락한 꿈의 조각들로 썩어가지만 봄이 되면 다시금 푸르른 숲이 된다.
숲의 영혼을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호수
고여 있는 슬픔이다. 고여 있는 침묵이다.
강물처럼 몸부림치고 흐르지 않고 바다처럼 포효하며 일어서지 않는다.
다만 바람부는 날에는 아픈 편린으로 쓸려가는 물비늘.
기다림 끝에 흘리는 눈물들은 기다림 끝에 흘린 눈물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호수가 된다.
온 하늘을 가슴에 담는 사랑이 된다.
가을
영혼마저 허기진 시인의 일기장 갈피로 제일 먼저 가을이 온다.
고난의 세월 끝에 열매들이 익고 근심의 세월 끝에 곡식들이 익는다.
바람이 시리고 하늘이 청명해진다.사랑은 가도 설레임은 남아 코스모스 무더기로 사태지는 언덕길.
낙엽이 진다. 세월도 진다. 더러는 소리죽여 비도 내린다. 수은주가 떨어지고 외로움이 깊어진다.
제비들이 집을 비우고 국화꽃이 시든다. 국화꽃이 시들면 가을이 문을 닫는다.
허기진 시인의 일기장 갈피로 무서리가 내린다. 가을이 끝난다.
가을이 끝나도 외로움은 남는다.
철새
떠돌던 나그네의 영혼이다. 날개를 얻어 구만리장천을 날 수는 있어도 아직 윤회의 바다를 다 건너지는 못했다.
계절이라는 이름의 건널목에서 날개를 접고 앉아 잠시 안타까운 사랑을 배우다 떠나갈 뿐이다.
모든 건널목마다 이별이 기다리고 모든 건널목마다 재회의 기약이 백지화된다.
달밤에 떼를 지어 윤회의 바다를 건너갈 때 그 울음 소리를 듣고도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은
진실로 나그네의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
반드시 마음 안에서만 자란다. 마음 안에서만 발아하고 마음 안에서만 꽃을 피운다.
사랑은 언제나 달디단 열매로만 결실되지는 않는다. 사랑에 거추장스러운 욕망의 덩굴식물들이 기생해서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사랑은 나를 비우고 너를 채우려 할 때 샘물처럼 고여든다.
그 샘물이 마음 안에 푸르른 숲을 만든다. 푸르른 낙원을 만든다.
온 천지를 둘러보아도 사랑의 반대말이 없으며 온 우주를 살펴 보아도 아름다움의 반대말이 없는 낙원을 만든다.
사랑은 바로 행복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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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 계곡에 어둠이 내립니다.
젖은 날개같이 쳐진 마음이 된 나그네는 허술하고 산만스런 암자에서 잠을 청합니다.
자정이 가까워지니 휘엉청 달빛은 밝고,
반쪽이 된 하현달이 중천으로 떠오를 수록 창호지문에 비치는 기와지붕의 그림자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 옵니다.
산사의 밤은 냉기흐르는 공기에 휩싸여 밤을 우는 산새 소리 한가닥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 깊어갑니다.
수렴동 계곡의 가을밤은 찬 달빛과 함께 냉냉하고 외롭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