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가을이란 말을 하지 않아도
이젠 어쩔 수 없는 가을 복판에 서 있습니다.
바람이 불었지요.
비도 내렸답니다.
비가 온다한들 어떻겠어요. 우린 비오는 날 더 잘 다니잖아요.
생뜨페테르부르그의 비오는 날 아침, 우산 속의 우리 둘을 기억하고 있지요?
세상 어디에서라도 비가 오면 어떻고, 바람불면 또 어떻겠어요.
오늘도 비오는 공원을 걸었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우린 행복에 젖어 세상을 거닐었 듯, 인생길도 그렇게 거닐며 살아요.
플라타나스가 비에 젖어 한껏 멋스럽네요.
빗속에서도 바슬바슬 웃는 낙엽은, 정겹고 서러웠답니다.
걷다보니 은비랑 다람쥐에게 개암을 주며 놀던 곳까지 왔습니다.
인생살이가 그렇듯이, 비가 온다고 바람이 분다고 주춤거리며 낙망할 필요는 없지요.
햇살 고운 날만 아름다운 건 아니니까요.
이렇게 비오는 날도 더 좋을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잖아요.
숲에서는 가느다란 빗줄기는 잘 보이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선명하지요. 수십미터의 거목들 사이에서 조그만 키작은 나무가
아름다운 빗방울소리를 튀겨내고 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작은나무 옆에서 한참이나 귀기우렸습니다.
뽀얀 잎새에 가랑비 듣는 소리가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우린 이렇게 거목속의 작은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알아들을 줄 아는
마음의 귀를 열어 놓고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대와 나는 천생짝꿍~
그래서 내가 어딜가나 그대 생각을 하게 되지요. ^&^
비오는 날이라고 온종일 비만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간간이 해도 비추고 여우비도 오고...
그러다가 푸른 하늘도 한자락 펼쳐놓습니다.
공원에서의 하루 날씨가 우리네 인생살이와 꼭 같았습니다.
햇빛이 나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지요. 여우비는 무시로 내리니까요.
그런들 또한 어떻겠어요. 지금의 햇살을 반기면 되는 거지요.
호두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촉촉한 잔디위에 그냥 앉았습니다. 눈을 감고 호두나무의 기운을 마십니다.
어디선가 툭~툭~소리가 들립니다.
소리난 곳을 자세히 보니 호두알이 떨어졌습니다.
저쪽 호두나무 아래에서 호두를 줍고 있는 사람을 따라 나도 호두를 주웠습니다.
호두를 줍다가
어느 해 가을, 올림픽 공원 테니스코트에서 테니스 경기를 보고 난 후에
은행나무 아래에서 은행을 줍던 우리들을 떠올렸답니다.
그날도 오늘처럼 즐겁게 은행을 주웠었는데....
오늘은 그대가 내 옆에 없어 조금은 쓸쓸했다우.
인생길 위에는 이렇게 덤같은 선물이 곳곳에 숨어 있다가
축복처럼 어느날 문득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행운처럼 갑자기 우리곁에 날아와 앉지요.
생트페테르부르그의 밤 열한시의 붉은 노을처럼....
상상도 못했던, 기대도 하지 않았던, 꿈에도 생각지 않던 일들이
우리네 인생길 위 어딘가에 그렇게 숨어있다가 욕심없는 마음곁으로 다가와 준답니다.
다시 비가 내렸습니다. 햇살 비껴 여우비가 보슬거리더군요.
우산이 없는 나는 숲속길로 접어들어 비도 피하고 나뭇잎에 듣는 빗소리도 들으며
해와 바람과 비와 나무와 함께
그대를 그리워했습니다.
쏘공원에 들어서면 언제나 그리워지는 그대를....
우줄우줄 서 있는 나무들의 뽀얀 줄기를 보며
러시아의 어느 시골마을 길에 끝도 없이 우거졌던 자작나무를 추억했습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나무가 우리들의 추억어린 자작나무가 아닌들 어떻겠어요.
우리 마음속에 간직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소중하지요.
우리들의 자작나무숲처럼
파리에선 마로니에숲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가을날에....
그리고 나는, 내일도 오늘처럼 공원을 거닐며
그대가 올 날을 헤아려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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