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반 전에 '이모'는 온갗 고생으로 얼룩진 연변의 생활을 접고
거금을 주고 부탁한 거짓 서류를 들고 네덜란드를 거쳐 파리에 왔답니다.
새벽 두세시면 쏟아지는 잠을 털어내고 뒷산에 나무하러가는 엄마를 따라
아홉살 소녀는 20Kg의 나무짐을 지고 마을로 내려오며,
평생소원이 잠을 실컷 자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중학교를 겨우겨우 마치고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지내던 시절이
지금도 매일밤 찾아오는 불면증으로 이어져,
살아가는 나날이 죽은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하늘까지 사무친답니다.
지금 '이모'나이 사십 후반.
연변살이 때부터 배알이를 심하게 한 이모는 파리에 와서도 늘 심한 통증으로 고생을 하고
그럴 때마다 중국의사에게 가서 진통제를 받아와서 먹고는 했습니다.
식당에서 주방일을 하면서도 너무 배가 아파서 식당을 그만 두게 될 입장에 놓였습니다.
그때 마침 은비네는 보모가 필요할 때였구요.
'이모'는 누군가의 소개로 은비네로 와서 은비의 보모며 가사도우미로 함께 기거했습니다.
그러기를 9개월. 늘 아프다고 하는 이모의 상태가 걱정스러워 은비엄마는 동네에 있는
큰 개인병원으로 함께 가서 진찰을 받도록 도와주었더니 위암이 심한 상태라고....
너무 긴박한 상태라 병원에서는 시급히 수술을 권했고
설상가상 '이모'의 난민증 만료기간은 단 며칠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였습니다.
천운으로 '이모'는 빠른 며칠내에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위암덩이는 떼어져 나갔습니다.
난민들에게는 의료비 부담없이 국가에서 해결을 해 주니까요.
프랑스라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에 대한 안전한 의료제도가 '이모'를 구한거지요.
치료를 마치고 얼마 후에 '이모'에게는 10년 간의 프랑스 체류증이 발급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장기적으로 매우 세심한 치료가 필요한 중증환자이기 때문에
10년간 이 나라에서 체류를 하면서, 병을 치료해서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보살피는 거지요.
품질좋은 약이 정기적으로 지급되고, 정기적인 검진과 치료를 받습니다.
건강을 웬만큼 되찾은 '이모'는 은비네 부모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고,
은비부모들은 '이모'가 프랑스에 온 것이 천운이었으며, 죽은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병도 낫고
10년 체류증도 받아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모든것은 '이모'의 복이라고 말합니다.
중국에서 불법으로 그렇게 입국한 사람들도 어찌어찌 루트를 통해 (변호사에게 돈주고) 난민증을 발급받고
6개월은 프랑스국가의 보호를 받고 살지만, 그 후에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추방도 되고, 살아 남기도 하고...
그러나 북한만은 6개월 난민증이 보장하는 생활을 마친 후에 즉각 10년짜리 체류증을 받는답니다.
왜냐구요?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인민이 핍박받고, 귀국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국가라는 낙인이 찍힌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의 나라로 되돌려 보낼 수 없다는 프랑스 국가적 판단에서랍니다.
그래서 많은 중국사람이나 연변조선인들은 국적을 북한으로 돌려, 체류증을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모'는 연변에서 살 때부터 위암일거라고 의심이 되었지만, 치료비가 걱정되어 병원엘 가지 못했답니다.
프랑스라는 나라에 와서 생명을 건지고, 삶도 얻은 거지요.
그리고 지금은 은비네 작은레스토랑의 주방장으로 생활기반도 튼튼합니다.
"엄마,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에겐 그렇게 좋은 이 나라가, 사업자에겐 얼마나 못됐는지
뼈빠지게 돈 버느라 고생해서 직원들 인건비랑 나라세금 내다가 등골 휘어지는 나라가 이 나라야"
하하하하
은비엄마는 오늘도 끌탕을 하면서 일터로 출근을 했습니다.
이 나라에 와서, 돈 잘 내고 공부하고, 세금 잘 내며 일하고, 국법 잘 지키며
착하게 사는 나에게 좀 빡빡하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고마움과 원망을 섞어 한바탕 수다를 늘어 놓고 '이모'가 기다리는 레스토랑으로 갔답니다.
이렇게 '이모'의 삶도
은비엄마의 삶도 저마다 제 색깔로
이곳 프랑스! 자유 박애 평등의 땅에서 익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