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편지

시월의 마지막밤을...

eunbee~ 2008. 10. 31. 10:57

그제, 이곳 은비오두막으로 이사를 마쳤습니다.

45년 7개월만에 고향땅에 내 짐을 부려 놓게 되었습니다.

한시적인 머무름이긴 하지만, 그래도 감회가 남다릅니다.

 

어제 밤엔 언니랑 오두막의 첫밤을 보냈습니다.

늙어버린 두 자매가  흙벽 작은 방을 따끈하게 뎁혀 두고 술잔 기우리고,

먼먼 옛얘기 나누며, 정답고 애잔한 밤을 보냈습니다.

반쯤은 지새우고, 반쯤은 뒤숭숭한 꿈으로 채웠습니다.

 

10년 전에 세상 하직하신 엄마의 뽀얗고 포근한 스웨터를 입어 보던 언니는

'어머나~ 이 옷이 이젠 내게 딱 어울리네.' 하더라구요.

울엄마가 여든살때 입던 옷을 내가 간직하고 있답니다.

예쁜 앙고라 흰 스웨터와 공주님 옷처럼 생긴 아른아른~ 하늘하늘~

어깨에 모란꽃처럼 피워 올린 셔링shirring이 아름다운 브라우스 하나를,

울엄니가 돌아가신 후, 옷 정리를 할때 내가 간직하겠다고  챙겨 둔 것이지요.

그 옷을 입어 보는 언니는 어느새 울엄마를 닮아 있더군요.

내 엄마같은 할머니가 되어....

 

잠에서 깨어나니, 시월의 마지막 날이 비에 젖고 있습니다.

저대로 살아가는 강아지들은 늦가을 새벽비에 젖어 깨갱거리고 있습니다.

밤새 풀더미 속에서 잤나봅니다.

강아지 인생도 참으로 외로워 보여, 오늘은 따스한 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줄 참입니다.

 

뿌연 호수 위의 가을비를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렸습니다.

--'머언 먼 인생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그렇습니다.

하많은 이야기를 엮으며 살아 온, 내 45년의 타향살이 인생길 끝자락에서

잠시 뉘어보는 고향 살이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습니다.

먼먼 인생의 뒤안길에서, 때로는 서성거리고 때로는 가슴저미는 슬픔과...

겨운 행복에 환희롭기도 하던 내가

이제는 고향마을 과수원 오두막에 짐을 부리고

잠시 쉬어가렵니다.

조금은 늦은 것 같기도하고, 어쩌면 조금은 이른 듯도 한 '나의 지금'.

떠날 때 철없던 열아홉의 내가, 역시 철없는 예순 다섯의 연륜으로 돌아와

고향에서의 세월을 채워 보렵니다.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 밤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비오두막에서 혼자 보내는 첫 밤이 될 것입니다.

나뭇가지 끝에 부는 소슬한 늦가을 바람과 그리움 담은 별이, 나의 밤을 채워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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