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재크의 콩나무

eunbee~ 2008. 7. 7. 07:40

 

 

어느 늦 가을 날

동숭동에 있는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하기에

지하철을 타고 그 곳으로 나갔다. 늘 그렇듯이 혼자서...

영화는 되도록이면 혼자 보는 것이 좋다.

영화관에서 티켓을 예매하고, 시간이 남기에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지하철을 타고 와서 인지, 분당 촌놈이 서울 한복판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정신이 나갔는지

속이 좀 매스꺼워 상큼한 음식을 먹고 싶었다.

'낙지 볶음'

그래 저 것이 좋겠다.

그 안내판이 놓여있는 건물의 3층으로 올라 갔다.

음식점은 깔끔하고, 유럽스타일의 실내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대학생인 듯 싶은 몇몇 젊은 이들이 몇 테이블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운좋게도 아직 남아 있는 넓은 창가에 앉을 수 있었다.

매운 낙지볶음을 주문하고 창밖을 내다 보았다.

 

와~~~

탄성이 저절로 흘렀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경은 내 생전 처음이다.

노오란 은행나무가 내 눈 아래, 아니 내 발 밑에 환한 불을 밝히고

우람한 가지들을 뻗어 풍성하게 서 있는게 아닌가.

수많은 은행잎들은 노오란 불을 켠 듯, 나무 전체가 거대한 등불이다.

노란 잎에서 반사되는 빛들은 창문을 통해 레스토랑 안까지 밝혀 주고 있다.

그 거대한 은행나무 꼭대기에 내가 앉아 있다 !!

작은 은행잎 등불을 손에 든 재크가 되어...

 

검고 힘찬 줄기들은 재크의 콩나무 가지처럼 하늘에 닿을 듯 싶다.

은행 나무는 얼마나 오래 되고 큰 나무인지, 건물 창문들 전체의 넓이를 채우고도 남는다.

3층에 앉아서 내려다 보는 느낌은 마치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황홀한 기분에 취한 나는 나무 위에 앉아, 은행나무 잎들과 얘기하는 기분이 되어

주문한 음식 맛이 매웠는지, 어땠는지 조차 느낄 새 없이,

내가 올라 앉은 은행나무에 한껏 취해 있었다.

 

거기에 그렇게 오래 앉아 있고 싶었지만, 예매해 둔 영화 관람 티켓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꾸만 눈이 가는 은행나무를, 아니 내려 오기 싫은 은행나무 위에서, 나는 아쉽게 내려 왔다.

내년 가을에 다시 와서 또 이 나무에 올라 가야지...하면서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 후, 몇 번의 가을이 지나갔건만, 나는 단 한번도 그 나무에 오르지 못했다.

지금도 그 광경이 꿈처럼 내 머릿속에서 나를 황홀하게 해 준다.

눈을 감고, 수만개의 노란 등불을 켠, 늙은 은행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은행잎들 속에서 포근함과 황홀함에 젖어 있는, 작은 재크의 기분이 된 나를 느낀다.

 

그 가을 날, 동숭동 혜화역 부근에 서 있던 노오란 은행나무,

나에게 재크의 콩나무가 되어준 늙은 은행나무를

오래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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