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렇게라도 위로하며

eunbee~ 2023. 12. 9. 09:42


사평역에서

        - 곽 재 구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구는 많이 아프고
누구는 치매증세로, 찾아간 자기들을
슬픔에 빠트렸고
또 뉜가는 몇 달 전에 지수화풍되었단다.
고향 친구들 모임 전달 사항은
이렇게 서글픈 보고문으로 채워지고 있다.

우리 세월의 담담한 얘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투쟁이 소용없다 말하지 말라 .

                       - 아서 휴 클러프 -


투쟁이 소용없다고 말하지 말라.
고난과 상처가 부질없으며,
적은 약해지지도 쓰러지지도 않으며,
여전히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희망이 어리석은 것이라면, 두려움은 거짓을 말한 것이리라.
보이지 않는 저 연기 속에서,
네 전우들은 지금도 도망치는 적군을 뒤쫓고 있다.
그리고 너 없이도, 승리를 거두리라.

지친 파도들이 헛되이 해변에 부서지며
안간힘을 쓰며 한 치 앞을 못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먼 뒤쪽으로, 개울과 작은 만으로는
바다가 소리 없이 밀려들고 있지 않은가.

햇살이 새벽녘에 찾아들 때
햇빛은 동쪽 창으로만 스며드는 것이 아니다.
태양은 앞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떠오르지만
보라, 서쪽 대지도 환하게 빛나지 않는가.

Say not the Struggle nought Availeth  
- by Arthur Hugh Clough -

***

현 정권 꼬락서니가 엉망이다.
어수선하고 어처구니없고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일이
연일 부지기수로 만들어지고 있다.

시인이 읊조려주는 시 한 편 듣는다.
그리고 되새기며, 위로해 본다.
혹은 세상 바뀌기를 손 놓고 기다린다.
내겐 힘이라곤 투표권 외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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