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틈틈이 읽는 책읽기의 재미

eunbee~ 2011. 10. 29. 16:13

 여행중에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이나 환경이 되면 책을 읽습니다.

여건이라는 것은 장소와 주변 여건이고, 환경은 기차나 비행기로 이동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한 때는 대한항공을 이용하면, 항공사에서 준비해둔 책을 기내에서 빌려 읽을 수 있었으나 요즘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서비스가 없어진 까닭이지요. 그래서 책을 준비해 갑니다. 책을 가져가 봤자, 대부분의 시간을 영화보느라 정신이 없지만요.^^

 

 

지하철을 타거나 기차를 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읽는 책은 무게도 나가지 않고 책크기도 착해서 지하철 같은 곳에서 읽기에 매우 좋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라는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40여 통의 편지를 묶어낸 책입니다.

반 고흐의 그림그리기에 담겨있는 그의 그림그리기철학을 알 수 있기도 하고, 그의 생활과 마음 속까지도 읽을 수 있으니

심심풀이 책읽기에 안성맞춤이지요. 무엇보다 책이 작고 가벼운 것이 내게는 최고의 장점입니다.

여행(또는 이동)중에는 눈썹 한가닥까지 뽑아 두고 떠나고 싶은 것이 현실이잖아요.ㅋㅋ

 

 

300여 페이지 중 이제 100페이지를 읽었지만, 읽은 페이지를 다시 읽어도 좋은 책입니다.

읽은 것 중에 몇 페이지를 옮겨봅니다. 사진과 전혀 어울리지 않음을 이해바랍니다.

사진은 며칠전에 볼 일이있어 나갔던 삼성동에서 만난 국화 전시회 모습입니다.

가을엔 이곳엘 가면 '많이 촌스런 국화 전시회'를 '많은 공을 들여' 벌이고 있더군요.ㅋㅋ

 

 

테오에게로 시작되는 반 고흐의 편지입니다.

 

(.......)

바다 풍경을 담은 스케치에는 황금색조의 부드러운 느낌이 있고,

숲 그림은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를 띤다.

인생에 이 둘 모두 존재한다는 게 다행스럽다.

(........)

 

1882년 9월 3일 편지 중에서

 

 

(.......)

늙고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스가 그들을 거의 완벽하게 그려냈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는 게 이상하다.

여기 헤이그에는 매일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세계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지.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거리를 산책하다가 내가 어떤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은 "아, 저 지저분한 사람들 좀 봐."

"저런 류의 인간들이란!"하고 말하더구나. 그런 표현을 화가에게서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그래, 그런 일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런 장면은 사람들이 가장 진지하고 아름다운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라 느껴졌다.

한마디로 자기 입을 스스로 막고 자신의 날개를 자르는 짓이지.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는 반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집시들'을 좋지않게 생각하지만, 한번 생각해 봐라. 세상에는 '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도 모든 것을 잃는 자들' 이 있기 마련이다. 살다보면 촛불을 끌수도 있겠지. 하지만 미리 소화기를 들이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1883년 3월 21~28일.  편지 중에서.

 

 

(.......)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황야의 오솔길에 서 있는 아버지를 그리는 일이다.

히스로 뒤덮인 갈색의 황야를 좁고 하얀 모래길이 가로지르고, 그 위에 엄격하게 보이는 개성적인 인물이 서 있는 모습으로.

하늘은 조화롭고 열정이 담겨있어야 한다. 또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을 풍경 속에 서로 팔을 끼고 있는 그림도 그리고 싶다.

줄지어 서 있는 작은너도밤나무 숲과 낙엽을 배경으로 해도 좋겠지.

쉽지는 않겠지만 꼭 도전해 보고 싶은 시골 장례식 그림도 아버지를 모델로 하고 싶다.

종교적 신념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만 제외하면,가난한 시골마을의 목사는 인물 유형에서나 성격에서나 가장 공감이 가는 인물 중 하나다.

언젠가는 그 작업에 도전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모델을 알아보게 될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다. 세부사항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인물을 그 본질적인 특징에 따라 단순화할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그리려는 대상은 아버지의 초상이 아니라 병자를 방문하러 가는 가난한 시골마을의 전형적인 목사다.

이와 비슷하게 너도밤나무 숲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부부의 그림은 아버지, 어머니가 모델로 자세를 취해주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초상화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함께 늙어온 모습이다.

(.........)

 

1883년 7월 11일 편지중에서

 

 

 

 

 

 

이 날 나는 이건물이 있는 바로 앞 건물에서 볼 일을 마치고

영화를 한 편보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반 고흐의 편지를 읽으며 집으로 향했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이 메트로 안에서 열심히 책을 읽는 모습은 참으로 좋아보였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속절없이^^ 떠들거나 휴대폰수다를 멈추고, 책을 읽느라 조용한 메트로 문화였으면 좋겠습니다.

 

더보기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 화가로 일반적으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조울증으로 추측됨)을 앓고 자살을 감행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모두 만들어냈다.

그는 생존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특히 1901년 3월 17일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사후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에 미친 반 고흐의 영향은 막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보일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에 바쳐졌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도시인 오테를로에 있는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을  보유하고 있다.

반 고흐가 그린 몇몇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기도 한다.

1987년 3월 30일에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만 미국 달러라는 기록으로 팔렸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국돈으로 약 580억원)에 일본의 제지사업자 료에이 사이토(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당시 료에이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의 노르트브라반트 주에 있는 브레다와 인접한 쥔더르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개신교(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목사인 테오도뤼스 반 고흐이며,

어머니는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1819~1906)이다. 고흐는 이 둘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안나는 1년 전 같은 날 빈센트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도 똑같이 빈센트라고 지어 주었다. 또, 반 고흐는 그의 할아버지인 빈센트 반 고흐(1789~1874)와 이름을 같이했다.

할아버지 역시 개신교 교회 목사였다. 그의 집안은 종교적 활동과 미술을 추구했다.

1855년에는 여동생 안나(Anna)가 태어났다. 그리고 반 고흐가 태어난 지 4년 후, 그의 아버지의 아름을 딴 동생 테오가 1857년 5월 1일에 태어났다. 이어서 여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와 빌헤미나(Wilhelmien), 막내 남동생 코르넬리스(Cornelius)가 태어났다. 반 고흐는 진지하고 내성적이었으며,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1860년에 그는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준데르트 마을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1861년부터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3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32km 떨어진 학교에 다녔는데, 그는 가족을 집에 놔두고 떨어져 있는 것을 싫어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을 회상하곤 했다. 1866년 9월 15일부터 1868년 3월까지 그는 틸뷔르흐에 위치한 제2 빌렘 칼리지에 다녔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우울하고 차가웠던 불모스러운”시간이라고 했다.

 

청년 시절 (1869~1878)  
 1876년의 반 고흐16살에 빈센트는 삼촌 빈센트의 권유로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네 살 아래 동생이자 빈센트가 평생의 우애로 아꼈던 그의 동생 테오도 나중에 그 회사에 들어왔다.

이 우애는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엄청난 편지 모음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들은 보존되어 오다가 1914년에 출판되었다. 그 편지들은 그 화가의 삶에 많은 통찰을 주었고, 그가 예민한 마음의 재능 있는 작가라는 것도 보여 주었으며, 무명화가로서의 고단한 삶에 대한 슬픔이 묘사되어 있다.

테오는 빈센트의 삶을 통틀어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1873년에 그의 회사는 그를 런던으로, 다음에는 파리로 발령했다. 그는 점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76년에 구필은 동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는데, 이는 고흐가 가게에서 영업활동을 할 때, 손님들과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언쟁을 자주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잉글랜드 켄트 주의 감리교학교 램스게이트에서 견습교사가 된 다음 1877년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보리나주 
1878년에 신학교를 그만둔 그는 보리나주로 알려진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에서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다.

광산에서 설교활동을 하던 고흐는 고용주들의 착취를 받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대다수 노동자들을 매우 걱정했다. 결국 그는 6개월 후에 해고되었고 보수 없이 일을 계속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880년에, 빈센트는 그의 동생 테오의 제안을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빈센트는 헤이그에서 안톤 모브로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다. 비록 빈센트와 안톤은 곧 예술적인 관점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헤이그 미술 학교의 영향은 그가 빛을 다루는 방식과 그의 붓 자국의 산만함에서 빈센트의 작품에 눈에 띄게 남아 있다. 그러나 어두운 색조를 선호하는 그의 색채 사용에서는 그의 스승과 차이를 두었다.

 

1881년~  1881년에 그는 과부인 사촌 케이 보스에게 그의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녀는 그를 거부했다.

나중에 그는 매춘부 신 호르닉과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이사하고 그녀와 결혼할 것을 생각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관계에 엄격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그의 동생 테오도 그것에 반대하는 조언을 했다. 무엇보다도 신 호르닉과 고흐는 성격차이가 있었고 결국 그들은 나중에 헤어졌다.

1885년과 1886년 사이의 겨울에 반 고흐는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펀의 미술 학교에 등록했다. 이 일은 실망만 안겨주었는데, 그가 몇 달 후에 외젠 시베르트 교수에 의해 퇴학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 고흐는 그 기간 동안 일본 예술을 접하고 관련 작품을 열렬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 예술의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그림에서 보인 선의 역할에 감탄했으며, 이러한 인상은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어 일본풍으로 약간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또한 그가 그린 몇몇의 초상화도 일본 예술을 보여주는 배경을 설정해 놓고 그렸다. 고흐는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을 소용돌이와 원색의 노란색으로 표현하여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등의 걸작들을 그렸다.

즉, 고흐의 그림속에는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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