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파리에서

레퀴엠에 싸여 쇼팽은 떠나다.

eunbee~ 2010. 12. 24. 17:04

 

방돔 광장 12번지, 쇼팽의 마지막 거처.

 

1831년 9월 말, 파리에 오게 된 쇼팽은 그로부터 18 년동안 아홉 번의 이사를 하며, 프랑스 시민으로 귀화하게도 됩니다.

여러 사람의 도움속에 작곡도 하고, 예술인들과 친교도 맺으면서 그리운 조국에 대한 향수를 가슴에 묻은 채 파리에서의 생활을 합니다.

 가장 기록될만한 일은 상드와의 10년 동안의 연애 사건이지요. 상드의 보살핌 속에서 작곡도 활발히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돔광장 12번지에서의 생활을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눈 내리는 날의 마들렌 성당 옆 모습

 

1849년 여름에 쇼팽의 누나가 찾아옵니다. 쇼팽이 처음 피아노를 배운 것이 누나에게였다고 하지요.

쇼팽은 누나에게 자기의 심장은 조국에 묻을 것이며, 장례식에는 모짜르트의 진혼곡을 들려 달라고 유언합니다.

 

마들렌 성당 내부, 미사 중

 

쇼팽은 폴란드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1849년 10월 17일 39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10월 30일 그의 장례식이 마들렌 성당에서 거행됩니다.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짜르트의 레퀴엠이 울려 퍼집니다. 

장례식이 거의 2주나 늦어진 것은 마들렌 성당에서 진혼곡이 연주되어야 하는데, 여성의 노래가 허용되지 않는

로마 카톨릭의 관습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끝내는 쇼팽의 유언을 성당측에서 받아 들입니다.

 

 

마들렌 성당 장례식장에는 3000 여명의 애도객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들은 장례식이 끝나고 페흐 라셰즈까지 관을 따라가며 쇼팽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쇼팽은 그가 조국을 떠나올 때 가지고 왔던 한 줌 조국의 흙과 함께 페흐 라셰즈에 묻힙니다.

 

 

조국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심약하고 병약한 음악가는 타국에서 그렇게 일생을 마칩니다.

 

성당내  제대의 조각상 Le ravissement de Sainte Marie-Madeleine

'막달라마리아의 황홀경' 이렇게 번역해야 하나요?

 

성당내 파이프 올겐

 

 2010년 가을에 찍은 페흐 라셰즈의 쇼팽 무덤 **페흐 라세즈에 관한 포스트는 카테고리 [파리의 정원,공원]에 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쇼팽의 무덤 위에는 깨진 리라를 든 소녀상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무덤 앞에는 갈 때마다 추모객이 많았지요.

 

 

그의 나이 스무살 때 조국을 떠난 외로운 음악가는 그렇게 세월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을 너머, 그의 음악 속에서 그의 영혼의 소리를  영원히 듣게 될 것입니다.

 

마들렌 성당 문을 나서니,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멀리 콩코흐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는 쇼팽의 환영처럼 아슴아슴 가물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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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은 바르샤바 근교에서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 쇼팽과 폴란드인 어머니 유스티나 크리자노프스카 사이에서 내어났다. 쇼팽자신과 가족은 쇼팽이 1810년 3월 1일에 태어났다고 말하지만, 로마 카톨릭교회 세례기록을 보면 2월 22일에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되어있다. 쇼팽의 재능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그것이 모짜르트에 비견될 정도였다. 6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8세 때에 공연을 가졌다.7세 때는 이미 두 개의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그의 천재성이 바르샤바에 보도되면서 귀족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고 자선공연도 하기 시작했다.그의 첫 피아노 레슨은 1816년에 바이올리니스트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받게 되었는데,1822년 스승은 이미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 두었다.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헤름 뷔르펠에게 수학했다,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졌으며,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해, 재학중에 피아노와 가극을 위한 작품 [라치다램 변주곡]을 작곡하여 일약 유명해졌다.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 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유럽 여러나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그가 빈에 도착하였을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고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조국을 향한 마음을 음악에 담아 노력하고 작곡하여 폴란드인으로는 최초로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그는 즉흥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이다.

파리에서의 생활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쇼팽이 유명한 작품을 남긴 것이 이시기이다.1838년 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외젠 들라크루아가 그의 친구였으며,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는 친할 뿐만아니라 그들의 음악을 비평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음악을 헌정하기도 했다.1836년에 쇼팽은 17세의 폴란드 소녀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약혼을 했으나 그의 병으로인해 취소되었다. 그해에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주선한 파티에서 소설가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

그들은 10년 간 연애관계가 지속되었고,쇼팽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헤어졌다. 쇼팽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로마 카톨릭 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겨울은 혹독한 추위가 있었고,쇼팽은 파리에서 먼길을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때의 절박한 기분을 스물네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번)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추위는 그의 건강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상드와의 관계는 불륜으로 오해받아 쇼팽을 괴롭혔다. 그들은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으며, 쇼팽은 그 이후 건강이 회복되지 못했다.

죽음

1840년대에는 쇼팽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여러곳을 여행하며 요양에 힘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 마지막 힘을 쏟았다.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단조로, 폴란드를 생각하며 작곡한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그는 사망한다.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는 낭포성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나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로마카톨릭 성당인 마들렌에서 열리게 되었는데,유언에 따라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려면.여성 성악가의 역할이 중요한데, 마들렌 성당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성악가를 허용하지 않았다.이에 대한 마찰로 인해 장례식이 2주동안 연기되는 사태가 발생했으나 결국 쇼팽의 소원에 따라 교회측이 양보를 하게 되었다. 시신은 파리 페흐라세즈에 안장되었고,그의 심장은 폴란드 바르샤바 성십자가교회에 있는 기념비 아래 묻혔다. 

***검색해서 옮겨 온 글***